9월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를 본 관객이라면 영화에서 발견의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술에 취해 눈이 반 잠긴 얼굴로 여자 후배 선희(정유미)의 손을 잡으며 안타까운 연정을 드러내는 모습만으로도 정재영은 첫 호흡을 맞춘 홍 감독 영화 세계에 천연덕스럽게 스며든다.
내달 9일 극장가를 찾는 코미디영화 '플랜맨'은 정재영의 가치를 좀 더 명확히 입증한다. 지나친 강박장애를 지닌,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 기이한 남자 한정석이 벌이는 일대 소동은 그의 연기로 설득력을 얻는다.
'플랜맨'은 분 단위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도서관 사서 한정석이 털털한 인디 여가수 유소정(한지민)을 만나 삶을 억눌러온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는다.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 흐트러진 침구를 정리하고(심지어 다리미질까지 한다) 매번 같은 시간에 출근길을 나서는 정석의 결벽증과 강박이 영화 속 웃음의 대부분을 관장한다. 근엄한 표정으로 속옷 하나하나를 다리고 옷에 묻은 이물질 때문에 쩔쩔매며 단골 세탁소로 급히 달려가는 모습 등이 정재영의 섬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과 잘 계산된 몸동작으로 구현된다. 통제되지 않는 야성미를 풍겼던 정재영의 연기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다고 착각해 삶을 정리하려는 엉뚱한 야구선수 동치성('아는 여자')이 그나마 가깝다고 할까.
영화는 정재영의 코믹 연기 위에 남녀의 달콤한 사랑을 얹는다. 편의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소정과 정석을 지속적으로 이어주는 영화 속 음악은 웃음과 낭만을 전하는 또 하나의 활력소다.
영화는 비정상적으로 깔끔하고 정확한 정석의 생활 뒤에 감춰진 오래된 과거를 막바지에 드러낸다. 원주율을 끝도 없이 외울 수 있었던 천재 소년에게 쏟아졌던 지나친 사회적 관심과 기대가 불러온 비극이 관객의 눈물을 노린다. 덧없는 웃음으로 그칠 이야기를 감동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감정의 고조를 위한 것이겠지만 영화 뒷부분 과하게 잔혹한 장면이 등장해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럼에도 정석이 아픈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과 콧물을 한없이 쏟아내는 장면에선 박수가 절로 나올 듯하다. 정재영에 의한, 정재영을 위한 영화라 해도 과하지 않다. 성시흡 감독의 데뷔작이다. 15세 이상 관람 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