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윤(28)씨는 전도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다. 2011년부터 프랑스 페이 드 라 루와 국립 오케스트라(ONPL)의 악장을 맡고 있다. 낭트와 앙제를 본거지로 한 서부 프랑스의 대표 악단 ONPL에서 최고 단원 역할을 벌써 3년째 수행 중이다.
4세 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2004년 티보 바르가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1위, 2005년 롱티보 콩쿠르와 2009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등 경력도 화려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다. 2000년 예원학교 3학년 재학 중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박씨는 유학 2년 차에 심각한 어깨 통증을 겪었다. 요리책 보는 게 취미였던 그는 평생 과업으로 여겼던 바이올린을 놓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 그 때 프랑스의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루'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진학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홈페이지를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다. 다행히 어깨는 금세 나았지만 요리는 그의 평생 친구가 됐다. "장 보고 음식 만드는 순간이, 고된 연습으로 지친 나 자신을 응원하는 시간"이라는 그다.
"처음에는 유학 생활이 외롭기도 하고 심심하기도 해서 매일 소꿉장난하듯 밥을 차려먹었어요. 사진으로 남기면서 혼자 뿌듯해하고. 그러다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하거나 엄마 손맛이 그리운 한국 후배들에게 밥을 해 먹이는 즐거움을 알게 됐어요."
앙제와 파리 등 주로 유럽에서 연주 활동을 하는 그가 실내악팀 '트리오 제이드'의 일원으로 최근 고국 무대에 섰다. 그의 요리는 바로 이 내한 공연 때문에 맛볼 수 있었다.
다른 젊은 연주자들처럼 박씨도 오케스트라와 솔로, 실내악 활동을 병행하며 음악의 폭을 넓히고 있다. 예원학교 스쿨버스에서 얼굴을 익혔고 2002년 프랑스 파리고등국립음악원에 함께 입학하면서 인연을 맺은 피아니스트 이효주(28), 첼리스트 이정란(30)씨와 팀을 이룬 트리오 제이드의 이번 공연은 올해 초 아트실비아 실내악 오디션 우승을 계기로 결성 8년 만의 재도약을 선언하는 연주회였다. 박씨 개인적으로도 ONPL 악장 활동을 통해 깊어진 음색을 선보일 수 있는 자리였다.
"오케스트라 활동 전에는 솔리스트로서 콩쿠르 입상을 염두에 두고 음악을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좀 더 완벽한 테크닉을 익히는데 많은 노력을 쏟았어요. 오케스트라 활동 이전과 이후의 제 연주가 많이 달라졌죠."
2011년 ONPL에 입단하면서 최연소 단원이자 외국인 악장이 된 박씨는 프랑스 국영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등 현지에서 큰 화제를 뿌렸다. 그렇지만 100명이 넘는 연주자가 모인 하나의 사회에서 중요 안건의 의사결정권까지 지닌 악장이라는 책임감 큰 자리를 맡아 어려움도 있었다. "입단 40년이 넘은 단원도 있었고 제가 최연소였으니 텃세도 물론 일부 있었죠. 그래도 악기별 악보(파트보)뿐 아니라 전체 악보(총보)까지 외워가며 준비를 완벽히 했더니 금세 적응할 수 있었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단원과의 거리를 좁히려고도 애썼죠."
베이컨 치즈 케이크와 단호박 베이컨 수프는 단원들을 위해 만들었던 음식이다. 연주 여행이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든든한 음식이 환영 받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웃 도시로 연주 여행을 다녀와 단원끼리 모여 열었던 파티에 가져갔던 음식이에요. 단호박만 넣기보다 우유와 생크림을 넣으면 수프가 좀더 부드럽죠. 밤을 삶아 넣거나 베이컨 대신 고기를 볶아 넣어도 좋아요."
그는 한 가지 조리법을 고집하지 않고 재료를 바꿔가며 어떤 레시피든 자기 스타일에 맞춰 요리하듯 자신의 느낌을 충분히 끌어내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
앞으로는 음반 발매, 독주회 등을 통해 국내 활동도 늘릴 계획이다. 우선 프랑스 나텍시스-포퓰러 은행 장학재단의 후원으로 포레, 레날도 한 등 19세기 프랑스 문화 번영기 벨 에포크 시대 작곡가를 중심으로 올해 녹음한 음반을 내년 여름 유럽과 한국에서 내놓는다. 국내에서는 음반 발매 기념 독주회도 예정돼 있다.
이런 일정 때문에 "요리책을 내고 싶다"던 박씨의 꿈은 당분간 미뤄야 할 듯하다. 앞으로는 장에 나가 신선한 재료를 구하고 음식을 만드는 것보다 연주에 화답하는 열정적인 객석의 환호가 새로운 삶의 응원이 되는 날이 쉴 새 없이 펼쳐지지 않을까.
박지윤씨는 취재진을 위해 만든 베이컨 치즈 케이크와 단호박 베이컨 수프를 망설임 없이 내놓으며 "음악가 특유의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요리가 내 의도와 다르게 나오면 아예 상에 올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주성기자 poe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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