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주변국을 격분케 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때 일본 총리실은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기 위해 참배했다"는 내용의 영문 보도자료를 냈다.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는 시대를 만들겠다는 결의를 하기 위함"이라는 아베 총리의 변명도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의 상징성으로 미뤄보건대 이중적이고 뻔한 흰소리다.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쳇말로 '유체이탈화법'류의 표현들이 나올 수 있는 의식구조다.
근대 들어 군국주의 시대 일본 정부나 숱한 지도자들이 했던 언행 불일치를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들이 앞세웠던 평화는 현상변경을 위한 위장막이나 구실에 불과했다. 주변국에 대한 강박이나 침략을 통해 국제질서의 변화를 꾀하려는 이면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예컨대 1930년대 초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운 일본에게 국제연맹이 철군을 요구하자 일본 대표 마츠오카 요우스케(松岡洋右)는 연맹 회의에서 "누가 뭐래도 일본의 목표는 평화다"라고 주장했고, 일본은 이후 머지 않은 시기에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강제로 빼앗은 한일강제병합도 그렇다. 그 조약을 보면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 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함만 같지 못한 것을 확신하여 체결키로 결의한다'고 돼 있다. 러일전쟁에 임박하여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공수동맹(攻守同盟)을 강제한 한일의정서도 1조에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서"라며 일본의 시정 개선 충고에 따르도록 했다.
아베 총리가 지난 9월 유엔총회에서 내세우고, 최근 국가안보전략지침의 기본이념으로 제시한 적극적 평화주의에 대해서도 우려가 되는 것은 단순히 그 현재의 함의 때문만은 아니다. 자위대 활동 강화와 집단적 자위권을 통해 세계평화에 더 적극적으로 기여하겠다는 뜻만으로도 군사대국화와 군사적 영향력 확대 의지라는 그 뻔한 속내를 평화주의로 포장하고 있으니 '무슨 꿍꿍이로'라는 의심과 긴장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그나마 이름에 걸맞은 내용을 갖춘 평화헌법의 해석 변경이라는 우회 방식으로 이를 관철하려 하고 있으니 더 그렇다.
일본 정부가 전쟁 책임을 부정하는 정치적 행위로 해석되는 야스쿠니 참배를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기 위함'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그 뜻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난 4월 아베 총리가 참의원에서 "침략의 정의는 국가간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했을 때 평화라는 말 속에 숨겨진 힘의 논리를 은연중에 드러냈다고 할 것이다.
국제질서의 현상변경은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옳고 합리적이라는 공통인식에 따라 국제사회의 자연스런 합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에서 과거청산 등을 통해 주변국의 신뢰를 얻고 유럽연합의 주도국이 된 독일이 예가 될 것이다.
2차대전의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인 아베 총리와 일본의 보수세력은 굳이 독일과는 다른 길을 뚫어보려는 의도를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역력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러한 흐름이 일본 주류세력의 분위기나 중국의 급부상과 미국의 상대적 약화라는 정세 변화와 무관치 않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호응할 줄 모르고 과거에 갇힌 일본의 한계이기도 하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은 나치즘의 득세로 유럽이 위기 상황에 빠질 때 썼던 이라는 저서에서 "제대로 된 정부라면 굳이 소피스트의 궤변을 빌리지 않더라도 다수 인류를 설득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정말 평화적인 현상변경을 원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바뀌는 것 없이 평화를 앞세울 때 우리는 그 이면을 직시해야 한다.
정진황 정치부장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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