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貫鄕)
권성우 기자의 세상 둘러보기
여말(麗末) 안향(安珦, 1243∼1306년)이 이 땅에 유학을 전파한지 700여년이 지났다. 유학은 이후 성리학으로 거듭나면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추종하는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따르는 기호학파에 의해 16세기 대성하게 된다. 또한 서당, 서원 등 각 교육기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쳤고 과거시험에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아울러 성리학은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을 거치며 정치 뿐 아니라 우리 실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면서 뿌리내려 오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요즘 임지(任地)에 내려온 각 부처의 장(長)과 관리자들이 옛날로 치자면 민초(民草)들의 시름과 고통을 덜어내고 달랠 목민관쯤 될 것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도 목민관으로서 갖추어야할 덕목을 각편 6조씩 총 72조의 12편으로 구성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수령의 업무 지침서로 완성했다. 하지만 부임지의 관리자들이 이것을 다 갖추기는 무리일지라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소양과 육체적 뿌리에 해당하는 씨족의 내력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해 각 문중마다 대동보-파보-가첩을 만드는 것이 문벌귀족의 상징으로 대변됐다. 또 혼례 시 사성(四星)을 작성하는데도 관향과 이름이 꼭 들어갔다. 이처럼 관향이 차지하는 비중은 관·혼·상·제에 반드시 참여(?)하고 기명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만큼 집안의 혈통과 내력이 중요시되어 내려왔고 그 가계도를 숙지하고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것이 그 가문의 힘이었다. 그것도 일제 36년의 혹독한 식민치하에서도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을 정도이다.
얼마 전 대구·경북의 관공서 업무를 대행하는 장(長)을 만난 적이 있다. 으레 명함을 건네받았다. 처음 방문하는 자리이고 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관향이 어디세요?”라고 질문했다. 되돌아온 대답은 “(한참을 머뭇거린 뒤 상기된 얼굴로) 모릅니다.” 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센터장과 함께 젊은 시절 소신 발언으로 이름을 날린 모 교수를 만났다. 계절 인사 겸 소장한(?) 내공도 가늠하기 위해 똑같은 질문으로 “관향이 어디세요”라고 물어 보았다. 순간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나지막한 데시벨의 문장이 흘러나왔다. “예, 황금동입니다” 옆자리에 좌정한 센터장도 순간 고개를 떨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센터장은 이내 말을 받아서 정치이야기로 화두를 바꾸는 것이었다. 기자생활 24년의 경륜이 묻어나왔다.
각 기관을 대표하는 자(者)들이 부임지에 내려오게 되면 맡은 기관의 크고 작은 행사장에 대표 자격으로, 유관기관의 내빈자격으로 참석하게 된다. 거기에는 간혹 지역 유림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경우가 있다. 상시 그분들을 뵙게 되면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그러다 부임한 관리자가 지역집성촌의 성씨와 관향이 같게 되면 “몇 세손(世孫), 무슨 파(派)냐”로 이어지는게 다반사다. 이처럼 관리자 정도 되면 참석한 인사들로부터 ‘관향’, ‘시조’, ‘중시조’ 등의 질문을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따라서 집안의 족보를 뒤적이는 조금의 노력이 보태져야 할 것이다.
끝으로 알렉스 헤일리는 자신의 조상 쿤타킨테를 찾아 대륙 횡단을 서슴지 않았는데, 자신의 ‘뿌리’ 를 알고자 하는 일념으로 십여년에 걸친 현지답사는 못할지언정, 씨족의 내력과 관향의 뜻 정도는 관리자로서 알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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