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독립운동을 이끌고 철저한 금욕을 실천해 위인으로 추앙 받는 간디. 그는 자서전에서 부인과 잠자리를 갖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실을 고백한다. 전문가들은 회고록이나 자서전의 으뜸 미덕으로 솔직함을 꼽는다. 감추고 싶은 모습까지 사실대로 서술할 때 역사적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 정치지도자 등의 회고록 중 이런 미덕을 갖춘 것은 드물다. 자기합리화로 일관하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회고록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솔직해야
지난해 별세한 신상우 전 의원은 회고록 에서 5공화국 시절 '어용 야당'이라는 비난을 샀던 민한당에 참여한 경험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전두환 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얘기, '구(舊)정치인'으로 몰려 활동이 규제되자 재심 신청서를 쓴 얘기 등을 서술하며 당시 심경을 밝힌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내 행동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국회의원이 되는 길이 있다면 뚫어야 한다는 발버둥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부끄럽지만 이것이 당시 정치인들의 솔직한 초상이었다'라고 고백한다. 심지연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다른 정치인은 민한당에 참여한 사실을 숨기기도 하는데 5공 때 본인의 행적을 낱낱이 밝혔다는 점에서 용기 있는 회고록"이라고 평가했다.
유지에 따라 사후 출간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전라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1924년 1월 6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인이 두 사람이었고, 내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다.' 강만길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그 연령대를 살았던 사람 입장에서 출생 문제를 고백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부분을 고백했으니 다른 것도 정직하게 썼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자금 문제를 투명하게 밝히지 않은 점, 아들들의 비리 얘기를 소략한 점 등을 한계로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한 학자는 "작은 진실로 큰 거짓을 가렸다"고 평했다.
김영삼, 노태우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자기 미화적 기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은 치적에만 치중하고 외환위기 등 책임은 소홀히 다뤘다.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을 해명하며 후임자에게 물려주려고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끝내 인사를 오지 않아 전달할 기회가 없었다고 썼다. 이에 대해 한 학자는 "자기 합리화의 극치"라고 말했다.
자기 중심적이라도
자기합리화로 일관하는 회고록이라면 아예 안 쓰는 게 나을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1979년 12ㆍ12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정승화씨는 회고록에서 1974년 여름의 일화를 공개했다. 그는 당시 1군 사령관 최세인 대장이 술자리에서 "야, 경상도 놈아, 너희들끼리 다 해 처먹고, 자, 여기 술도 한잔 더 처먹어라"라고 말한 것을 상부에 보고한 사실을 밝히며 다른 사람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면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이 일 직후 최 장군은 예편했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전문대학원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논란이 있었는데 회고록을 통해 사실 관계가 정리됐다"며 "아무리 회고록이 자기 중심적이더라도 권력의 핵심에 있던 사람의 기록에는 건질 게 있다"고 말했다. 5, 6공 정권의 실세였던 박철언 전 의원은 다이어리 20권과 수첩 120권을 동원해 회고록 을 썼다. 그는 1989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한 사실을 밝히며 수표 일련번호, 은행 담당자 이름 등이 적힌 메모를 공개하기도 했다.
장면 전 총리는 회고록에서 결정적 순간에 대한 증언을 생략했다. 그는 5ㆍ16 쿠데타 직후 서울 혜화동 수녀원에 머문 행적을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적 기록일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장면 전 총리와 윤보선 전 대통령이 모두 회고록을 썼는데 얘기가 다르다. 장면은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한 윤보선이 쿠데타 세력과 결탁했다는 입장이고 윤보선은 장면 정부가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크로스체크를 하다 보면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씨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오원철씨의 회고록은 각각 나름의 한계가 있지만 시대의 명암을 드러낸 기록으로 평가 받는다. 김경재 전 의원의 대필로 출간된 김 전 부장의 회고록은, 과장과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 뒤섞였지만, 공작정치 등 정권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냈다. 7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오 전 수석의 회고록은 중동 진출 등 정부주도의 경제 개발을 세세히 기록했다.
현직 떠난 후 써야
공적 인물의 회고록이 언제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조영재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교수는 "정치적 입지 구축이나 정치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한 책들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그런 책들 때문에 회고록 전체가 불신을 받는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현직에서 물러난 후 회고록을 내는 것이 자리잡은 미국 정치권의 문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여러 분야 다양한 위치의 사람들이 더 많은 회고록을 남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개인의 기록이 역사가 되기도 한다. 6ㆍ25 전쟁 때 인공 치하 서울에 살았던 김성칠 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회고록 는 당시 상황을 증언해주는 객관적 자료로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등을 쓴 이원규 작가는 채명신 장군의 를 알찬 회고록으로 꼽고는 "채 장군이 지휘관의 입장에서 전쟁을 기록했다면 나는 무명소졸의 눈으로 본 전쟁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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