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종종 이미지로 기억된다. 인상적인 한 장면이 2시간 가량의 영화 내용을 웅변할 수 있고 그 장면만으로 영화는 관객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 올해도 제목보다 먼저 떠오를 선연한 이미지를 스크린에 남긴 영화들이 여럿 나왔다. 이중 5편의 ‘결정적인’ 장면을 돌아봤다.
지구에선 볼 수 없는 지구의 아름다움
등장인물이 단 2명인 ‘그래비티’(감독 알폰소 쿠아론)의 또 다른 주역은 지구다. 베테랑 우주인 매트(조지 클루니)와 신참 스톤(산드라 불록)이 한가로이 허블우주망원경을 고치는 도입부부터 지구는 스크린의 중심에 놓여 있다. 예상치 못한 재난으로 매트와 스톤이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도 지구는 무심하게 찬연히 빛난다. 카메라는 지구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지구의 아름다움을 비추며 살고자 하는 스톤의 의지를 반영한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에 지구를 떠나온 스톤은 지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삶의 가치를 우주에서 깨닫고 살기를 결심한다. 스톤을 살리려 한 매트의 용기도 갠지스강 위로 떠오르는 찬연한 태양을 목도했기에 가능했다.
위선적인 권위 따윈 필요 없어!
‘더 테러 라이브’(감독 김병우)는 한국 사회의 온갖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영화다. 한강 다리 폭파범은 실시간 방송 뉴스를 이용해 자신이 겪은 억울함을 호소한다. 시청률이라는 선정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의 언론 현실을 비판하는 설정이다. 국민의 안녕이 최우선이라 하면서도 테러범의 인질이 된 등장인물들의 안위에 대해 모르쇠로 대처하는 당국에도 영화는 노골적인 야유를 보낸다. 그래서 영화 막바지 방송국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언론 등 대중이 부여한 권력을 이기적으로 활용하는 자들을 향해 날리는 통렬한 한 방이라 할 수 있다.
후회 없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어바웃 타임’(감독 리처드 커티스)은 시간이동이란 이색적인 소재로 인생의 참 맛을 살핀다.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과거로 돌아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팀(돔놀 글리슨)은 시간여행을 통해 단순하면서도 간단치 않은 깨달음을 얻는다. ‘인생은 매일매일 사는 동안 모두가 함께하는 시간여행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 팀이 인생의 여인 메리(레이첼 맥아담스)와 결혼식을 올린 뒤 야외 피로연을 즐길 때 폭우가 쏟아진다. 얼굴이 구겨질 상황에서도 하객들과 신혼 부부는 폭죽 같은 웃음으로 현재를 누린다. 영화의 주제를 선명히 드러내는, 올해 가장 낭만적인 결혼식 장면이다.
위대한 무술인이 사랑하는 법
격동의 시절 고향도 잃고 가족도 잃은 위대한 무술인들은 무엇으로 살았는가. 홍콩의 유명 무술인 엽문의 삶을 그린 ‘일대종사’(감독 왕자웨이)는 화려한 액션에만 기댄 단순 무협영화는 아니다. 시대의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의 무술 종파를 지키기 위해 묵묵히 수련하며 삶을 살아낸 자들의 서러운 서사다. 서로를 갈망하면서도 종파를 위해 그리움을 삼키는 엽문(량차오웨이)과 궁이(장쯔이)의 첫 인연은 애틋하고 아름답다. 유려한 동작으로 무술 대결을 벌이는 두 사람은 주먹과 발차기로 서로의 몸을 희롱하고 마음을 교류하며 연심을 빚어낸다. 가장 시적인 무술 장면이다.
죽여야 했던 군인, 죽어야 했던 양민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2’(감독 오멸)는 제주 4ㆍ3 사건이라는, 역사에 묻힌 야만의 시대를 발굴한다. 해방 직후 혼란기 빨갱이로 내몰려 까닭 모를 죽음을 당해야 했던 제주도 양민들과 그들을 까닭 없이 죽여야 했던 군인들의 서글픈 순간을 스크린에 비춘다. 자신이 살기 위해 총을 겨눈 군인과 총구 앞에 얼어붙은 한 여인이 한라산 자락 눈밭 위에 선 모습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하얀 눈 위에 붉은 피로 쓰여진 고통의 역사는 세월이 흘러도 지워질 수 없다고, 우리가 그 역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제주 토박이 감독은 이 장면으로 조용히 역설한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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