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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12월 27일] 너를 잊은 듯 살아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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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12월 27일] 너를 잊은 듯 살아가도

입력
2013.12.2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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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으로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산악인 강기석에게.

이 겨울 내리는 눈발마다, 멀리서 보내오는 기별 같다. 한 점, 한 점, 무슨 말이라도 전하려는가. 너는 여전히 배낭을 멘 채로 눈 속에 있는 것이냐. 네 두 발은 여전히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중이냐. 여러 터무니없는 죽음들보다 낫지 않느냐고 스스로 다독여도 보았다. 그래도, 그렇게 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 원정대의 사고 소식을 접한 날에, 그 소식이 품고 있는 불길한 소문들은 믿지 않았다. 너는 이미 거대한 설산의 벽면들을 오른 산악계의 기대주였다. 더구나 인류 최초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우리들의 대장과 함께였다. 바로 그 대장과 함께 너는 2010년 히말라야 산 가운데 가장 험하다는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루트를 만들며 최초로 등정했다. 무엇보다, 너는 이제 서른 살이었다. 실패는 있을 수 있어도, 실종이라니.

사흘 나흘, 실종 대원들을 찾는 구조대의 수색이 길어지면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조차도, 나는 변함없이 일상을 살았다. 일상을 변함없이 살아야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김치냉장고에는 네가 원정에서 돌아오면 다시 끓여달라던 '형수 표 김치 굴국'에 넣을 김치가 익어가고 있었다. 일하고, 때 되면 밥을 먹고, 평소처럼 해찰하며 거리를 걸었다. 원정대원으로 너와 함께 갔으니, 지금쯤 너를 찾아 설산을 온 시신경으로 헤집고 있을 남편의 망울 큰 눈만을 염려했다. 너는 무사히 돌아올 것이므로. 수년 전 등반 도중 길을 잃었을 때 눈안개 속에서 홀연히 걸어 나와 그이를 구해주었다던 너이므로.

실종이 사망 보도로 바뀐 때에도 나는 네가, 수직으로 선 눈 덮인 벽에 피켈을 내리꽂던 그 정신과 그 힘으로 어디선가 끝끝내 버티고 살아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결국 너 없이, 원정대는 되돌아왔다. 배웅할 때는 다섯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둘이었다.

너를 그렇게 눈 속에 두고 돌아와, 도대체 말이 없거나 계속 울거나 하는 남편 옆에서, 밤이면 가위에 눌려 소스라치거나 너를 호명해 이승으로 불러오는 네 형 옆에서, 나는 시간을 견뎠다. 생사를 눈앞에서 놓치고 자신은 생으로 돌아온 사람이니. 나의 상상이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에 그는 머물렀고, 잠이 든 밤에 슬며시 발을 갖다 댔을 때에야 간신히 뿌리가 얽히는 느낌이었다.

사고 일 년 만에 너의 시신이나마 찾으러, 수색대와 함께 남편은 안나푸르나 사고지점으로 향했었다. 그리고는 역시 일 년 전 그때처럼 혼자 돌아왔다. 하지만 네가 빠졌을지도 모르는 그 크레바스들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넓은지 보았다고 했다. 찾을 수 없다는 현실에 완전히 승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깡마르고 까만 얼굴에 평화가 깃들었다. 네가 그곳에 잘 있는 것으로 마음의 좌표를 정하는 듯했다.

다시 일 년. 어느 해 여름, 네가 앉아 수박을 썰던 마루가 있는 한옥에서 우리는 여태 산다. 그 쪽마루를 밟고 지날 때면 나는 아직도 발바닥이 아프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라는 시 구절을 나는 여전히 못견뎌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너와 살아가고 있다. 이 눈발의 행간을 뒤적여 너의 안부를 묻기도 하면서. 먼 곳을 가졌다는 게 위로일 수 있을까.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저승의 그들이 잠시 이승에 소풍 오는 시간'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올 한 해를 살았고, 한 걸음, 네가 있는 세상으로 가는 길에 가까워졌다. 너를 잊은 듯 살아가도 너를 잊지 않았음을, 세상이 한 번 더 너를 기억하기를. 저 멀리 바라다보이는 희고 순정한 한 지점을 향해 생사의 날 선 경계를 온몸으로 밀며 올랐던 너를.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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