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평범하거나 멋진 이름이었던 곳들이 세상이 달라져 웃음거리가 되는 억울한 경우는 참 많다. 경북 영천시 고경면, 충남 예산군 봉산면, 전남 해남군 해남읍의 고도리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앉아서 고스톱만 치나? 고도리는 새 다섯 마리(五鳥)를 뜻하는 일본말이다. 한국인들이 고스톱을 많이 치기 전까지 고도리는 그냥 古道里, 옛길마을이라는 뜻이었다.
다만 해남의 고도리는 '고둣몰'이라는 별칭이 있는데, '곶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읍성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그래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나중에 한자로 古道里라고 했으니 좀 엉뚱한 일이다. 지난 회에 소개한 전남 영광군 백수읍은 白岫, 흰 바위굴이 있는 곳이지 실업자들의 고향은 결코 아니다. 岫는 '산굴 수'라는 글자다.
충북 충주시 소태면 야동리(冶洞里)도 야한 동영상이 나돌기 전에는 전혀 우습지 않았던 이름이다. 대구 북구 관음동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관음동과 그곳의 관음중학교를 관음증(觀淫症)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만 한자로 관음보살이라고 할 때의 그 관음(觀音)이다.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강원 정선군 정선읍 봉양리의 관음동도 같다.
충북 증평군 증평읍 연탄리는 연탄을 때기 전에는 여울이 이어지는(連灘) 마을일 뿐이었다. 개울물이 맑은 곳이리라. 전북 무주군 안성면 공정리의 사탄마을은 얼마나 이름이 멋진가. 한자로 沙灘이니 모래톱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악마, satan으로 오해를 받고 있다. 어이없는 일이다. 경북 영천시 북안면 효리는 가수 이효리가 뜨기 전에는 특별히 주목받을 이유가 없던 곳이다. 효리는 孝里다.
또 경남 진주시 지수면 압사리는 사람들이 깔려 죽는 곳이 아니라 鴨寺라는 절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강원 삼척시 도계읍 고사리도 말라 죽는 게 아니라 높은 선비의 고장이라는 말이다. 전북 정읍시 영원면 후지리는 후진 곳이기는커녕 後池, 마을 뒤쪽에 큰 저수지가 있다는 뜻이다.
사정동이라는 지명도 참 많다. 경북 포항시와 경산시는 선비의 정자, 士亭이고 경주시 사정동은 沙正洞이다. 옛날 남천(南川)에서 물은 아래로 흐르는데 모래는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 북서쪽 서천(西川) 가로 옮겼더니 물과 모래가 올바르게 흘러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모래가 올바르게 흐른다 하여 사정동이라고 했다. 대전 중구와 전북 군산시에 있는 사정동은 沙亭이라고 쓰니 완전히 다른 뜻이다.
경북 김천시 신음동은 1914년 김산군 군내면 금음리(琴音里)와 금신리(琴新里)가 통합되면서 김천군 금릉면 신음동으로 개편됐다가 1949년 김천시 신음동이 됐다. 1960년에는 신음1동과 신음2동으로 나뉘었지만 1983년 신음동으로 재통합됐다. 경북 예천군 개포면에도 신음리가 있다. 원래 용궁면 북상면의 지역인데 1914년 신기리와 화음리를 합치면서 한 글자씩 따서 신음리라 했다.
경북 안동시 남선면엔 도로리가 있다.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도율리의 '도'와 지로리의 '로' 자를 따 도로리가 됐다. 도로라고 하면 헛수고(徒勞)라는 뜻이나 '다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연상될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는 道老다. 이미 있는 지명을 합쳐서 새로 이름을 지을 때 오해받지 않게 더 좋은 말을 붙일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기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의 설마마을은 雪馬, 경기 연천군 연천읍 고문리는 古文, 강원 정선군 정선읍 가수리는 佳水다. 이상하게 생각할 게 없다.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박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의 대박마을 사람들은 대박을 노려 그곳에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대박은 大朴, 우리말로 한밝, 그러니까 크고 밝다는 뜻이다. 함백산의 원래 이름이 대박산(크고 밝은 뫼)이었다.
본래 뜻과 다른 의미를 연상케 하는 지명은 이처럼 많지만 이름 그대로인 경우도 있다. 경남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의 손목마을은 말 그대로 주변 지형이 손목과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巽木이라고 쓴다. 이 巽木이라는 한자에는 풍수지리적 개념도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그것까지는 지식이 짧아 잘 모르겠다.
지난 회에 언급한 전북 정읍시 산외면 목욕리도 목욕(沐浴)한다는 말 그대로다. 왕자산 아래의 이 동네는 원래 물이 맑고 좋아서 선녀들이 밤중에 주민들 몰래 내려와 목욕하고 가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멱수', '목욕소'라고 했던 것을 일제 때 개명했다고 한다. 나중엔 사업이 지지부진해졌지만, 1992년에 온천이 발견돼 관광지로 지정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인터넷에 사진이나 글을 올려 마을 이름이 우습다고 놀리는 것은 사실은 한자에 대한 무지이거나 인문지리 지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행위일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 때 엉뚱한 한자를 갖다 붙여 우습게 된 경우도 많다. 어쨌든 한자를 쓰면 큰일 나는 걸로 생각하지 말고 마을과 고장 이름의 유래와 이야기를 널리 공유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지명 이야기를 하면서 전국 여러 군 면 단위의 홈페이지를 뒤졌는데, 자기 고장에 관한 정보와 마을이름의 유래를 제대로 소개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이 글에 지명이 인용된 곳의 주민들이 부디 불쾌해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