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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2월 26일] 미성이를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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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12월 26일] 미성이를 보내고

입력
2013.12.2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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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이가 죽었다. 미성이는 원래 누군가 키우다 버린 고양이였다. 몇 년 전 어느 겨울 밤늦게 차에서 내리는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양이 한 마리가 저만치 차 밑에서 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고양이는 다가오더니 내게 머리를 비벼댔다. 회갈색 바탕에 고등어 등 무늬가 있는, 아주 잘생긴 수고양이였다. 원래 새끼 때 집안에서 살던 습관이 있어 밖에서 추위에 떨다 아무나 보면 거둬달라고 비벼댄다는 것은 나중에 사람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청명한 울음소리가 일품이어서 미성이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그 날부터 나는 미성이와 친해졌다. 처음에는 오래된 고기나 생선을 삶아서 조금씩 주었는데, 잘 받아먹는 것이 재미도 있고 예쁘기도 해서 나중에는 아예 사료를 사다 놓고 줬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신경도 안 썼고, 그저 눈에 띄면 재미로 먹을 것을 줬을 뿐인데도, 미성이는 내게 그 몇 배로 다정하게 굴었다. 점차 길냥이 생활에 적응을 한 뒤로는 동네 고양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는 것 같았다. 볕 좋은 봄날 꽃이 만개한 화단에 다리를 뻗고 앉아 게으른 하품을 하거나 암고양이 뒤를 쫓아다니거나 아스팔트 위에 누워서 뒹굴거나 미성이는 어디서든 제가 있는 곳을 명랑한 장소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지난해 여름 같은 단지 안의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온 뒤로는 부쩍 더 미성이와 친해졌다. 수시로 마당에 면한 거실 유리문 앞에 와서 야옹댔고, 여름에는 아예 방충망을 찢어서 개구멍을 만들더니 수시로 집안을 들락거렸다. 지하 공부방에 난 조그만 창문으로 내가 안에 있는 것을 보면 어느 틈에 공부방 문앞에 와서 들어오겠다고 야옹거렸다. 안으로 들여주면 옆에 앉아서 조용히 제 몸을 핥거나 잠을 잤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나는 미성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가야, 너는 어쩌다 고양이로 태어났니?" 지난 여름과 가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미성이가 옆에 있어서 쓸쓸한 줄을 몰랐다.

날이 추워지면서 미성이는 자꾸 집에 들어와서 자고싶어 했다. 매일 그런 것은 아니었어도 들여보내 주면 거실 소파 위에서 자고 아침밥을 먹고 가곤 했다. 며칠 전부터 기운이 없고 잘 먹지도 않고 털이 뭉텅뭉텅 빠져서 "미성아, 어디 아프니?" 하면 힘없이 다가와서 몸을 비볐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한 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지난 토요일 아침 마당에 얼어 죽어 있는 것을 경비아저씨가 마대자루에 담아 "댁에 고양이요?" 하며 건네주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밤새 우리 집 앞에서 울다가 지쳐서 얼어 죽은 모양이다. 나는 미성이를 끝까지 내 집 고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미성이는 우리 집을 제집으로, 나를 제 주인으로 안 모양이다.

설거지하다가도 목이 메고 청소를 하다가도 눈물 바람이다. 생각해보니 며칠 전 바쁘게 외출하면서 주차장 입구에 앉아 있는 미성이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불쌍한 것. 그렇게 가다니.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느님이 입히신다고 했던가. 하루아침에 차디찬 얼음덩이로 변할 것이 왜 그렇게 따뜻하고, 또 왜 그렇게 다정했는지. 하느님은 왜 이렇게 나약하고 덧 없는 것들을 아름답게 만드셨을까.

말 못하는 짐승과 너무 정들이지 말라고들 하고, 또 짐승에게 쏟을 정력이 있으면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똑똑한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이 사람과 정을 나누고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소중한 일이고, 우리 인생을 지켜주는 불꽃이다. 그러나 나는 미성이를 만나면서 우리가 모르는 존재들, 우리의 꿈과 고독과 나약함을 함께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로부터 오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모르는 존재들과 나누는 사랑은 어쩌면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 존재를 넓혀주고 살아 있는 만물을 연결해주지 않겠는가.

한밤중 마당에 나섰다. 눈 덮인 마당에 미성이가 누워있던 자리에만 눈이 없다. 가만히 그 자리에 발을 딛고 섰다. 내 눈앞에는 미성이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코끝이 시리다. 고맙다. 미성아.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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