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배우로 기억한다.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날린다지만 낭만적인 연애를 묘사하거나 그럴싸한 액션을 보여주진 않았다. 그저 바보처럼 박물관 전시물들에게 된통 당하는 야간 경비원('박물관이 살아있다'시리즈)이나 장인의 구박 속에서도 사랑을 지키려는 남자 간호사('미트 페어런츠' 시리즈) 사이 어디쯤에 그는 존재하는 듯하다. 벤 스틸러(48)에겐 순박하다거나 순진하다는 표현보다는 어리숙하다는 수식이 더 어울린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는 감독이기도 하다. 웃기는 역할로 지명도를 올렸으니 말도 안 되는 코믹 영화나 만들며 돈이나 버는 줄 알면 오산이다. 얼뜬 표정으로 웃음을 팔았지만 스크린 밖 그는 다부진 삶을 살았다. 10세 때부터 단편영화를 찍었다. 장편 데뷔작 '청춘 스케치'(1994)부터 남달랐다. 당대 청춘의 상징과도 같던 위노나 라이더와 에단 호크를 캐스팅했다. 사회 초년병의 방황과 고민을 그렸고 청춘물의 고전이 됐다. 짐 캐리를 내세운 '케이블 가이'(1996)도 평단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렇다고 마냥 근엄한 척, 지적인 척, 예술가인 척하는 감독은 아니다. 사람을 주유소에서 불태워 죽이거나('쥬랜더') 등장인물의 목을 댕겅 잘라('트로픽 썬더') 써늘한 웃음을 선사하는 고약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톰 크루즈를 대머리로 분장시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춤추게 ('트로픽 썬더') 만든 감독은 아마 스틸러 밖에 없을 것이다. 경박하다고 손가락질 할 수 없으면서도 쉽게 동의의 박수를 칠 수도 없다. 그렇게 스틸러의 영화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스틸러가 연출하고 주연까지 겸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31일 개봉)는 무척 특별하다. 스틸러의 기이한 발상과 엉뚱한 유머가 따스한 감성을 빚어낸다. 영화는 웃기고 애잔하고 유쾌하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세상의 모든 소시민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응원가 같은 영화다. 이 영화로 스틸러는 감독으로서 배우로서 꽃을 활짝 피운다.
영화의 무게중심은 월터(벤 스틸러)가 잡는다. 유명 잡지 '라이프'의 사진 편집자인 그는 16년 동안 일터와 집만 오가며 우직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여자 동료 셰릴(크리스틴 위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를 놀리고 윽박지르는 회사 구조조정 전문가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으면서도 그는 매번 상상 속에서만 용감하고 진취적이다. 그런 그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이자 도전이 닥친다. 라이프의 마지막 호 표지사진 필름을 잃어버린 그는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거쳐 히말라야에 달하는 장정을 치른다.
월터의 여정 속에서 관객은 상식 밖 장면들과 종종 마주친다. 월터가 서핑보드처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가며 도로를 파헤치거나 주정뱅이가 모는 헬리콥터 탑승을 주저하는 월터 앞에 셰릴이 등장해 기타를 치며 용기를 북돋는 노래를 부른다(물론 모두가 월터의 상상이다). 상상 속은 아니어도 비상식적인 모습이 무시로 등장해도 이 영화는 예상 밖의 감동을 준다. 뜨끈한 동료애와 은근한 가족애, 아늑한 로맨스, 절제된 웃음이 배합을 이루어 깔끔한 맛을 낸다.
스틸러는 영화사가 배포한 자료를 통해 "안전지대를 벗어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원하는 도전을 모두 해보기엔 남은 시간이 부족하다"고도 말했다. 웃기고 울리며 감정의 회오리를 빚어내는 괴작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그의 끊임없는 도전의 산물이다. 그는 어느새 조용히 대가가 되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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