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자살한 세무 공무원 사건에서 '심리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을 통해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사망을 인정했다. 심리적 부검이란 자살자의 유서는 물론 가족, 동료와의 면담 등을 통해 자살에 이르게 된 원인은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으로, 법원이 이를 통해 채택된 증거를 판결에 반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고법 행정9부(부장 박형남)는 세무 공무원 A씨의 부인 심모(45)씨가 "유족 보상금 지급을 거부한 처분을 취소하라"며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1심을 뒤집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2일 밝혔다.
부산지방국세청에서 근무하던 A씨는 2008년 허위세금 계산서 발행 상황 조사에 더해 유통과정 분석 업무를 추가로 맡았다. 인원 충원이 되지 않아 2009년 9~11월 약 204시간의 초과 근무를 할 정도로 과도한 업무에 시달렸다. 그러고도 승진 대상에서 탈락하자 A씨는 그 해 11월 29일 오전 5시쯤 아파트 22층 자택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A씨는 '내가 죽는 이유는 사무실의 업무 과다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입니다'라는 유서만 남겼다.
1심 재판부는 "업무가 과중하긴 했지만 사망의 직접적 원인으로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이 A씨의 심리적 요인에 대해 구체적인 판단이 부족했던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의 도움을 받아 1,000여건 이상 자살 사례를 연구한 민성호 연세대 원주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감정인으로 지정했다. 감정인은 변사사건 조사서류와 국세청 내부자료 및 A씨의 채무관계자료 등을 면밀히 조사하고, 부인과 자녀, 어머니, 직장 동료 3명에 대한 개별 면담을 실시했다. 또 A씨의 생전 말수 변화, 식욕 저하 및 체중 감소, 넋두리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A씨가 사망 직전 부하직원에게 "직원을 충원해 주지 않아 죽을 만큼 힘이 든다. 잠을 잘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라고 말한 사실과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유도제를 복용한 점 등을 입증했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A씨가 공무상 스트레스 외에는 자살할 만한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다"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책임감이 강한 A씨가 과도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특별승진 대상자에서 제외되자 심한 절망감과 함께 자신을 승진에서 제외하기 위해 부당한 다면평가를 실시했다는 배신감까지 더해져 중증의 우울장애가 발병했다"며 "이후에도 공무상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자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판단되므로 업무와 우울장애 발병 및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법원 관계자는 "감정인의 객관적인 조사가 이뤄지면 판결에 반영된다는 선례를 남긴 만큼 향후 심리적 부검을 활용하는 재판이 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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