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한 이 간절한 소원을 박근혜 대통령이 이어 받았다. 취임사에서 국정 기조로 문화 융성과 국민 행복, 경제 부흥을 제시하면서 문화 융성을 19번이나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문화로 행복한 국민, 그 힘으로 일어서는 나라'를 강조했다. 정부 예산의 1.39%에 그치고 있는 문화 재정을 2017년까지 2%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멋진 계획도 진작에 밝혔다.
빈 말이 아닌가 보다. 대통령 소속 자문기구로 문화융성위원회가 생겨 꽤 설득력 있는 정책 과제들을 제시했다. 대통령이 인문정신문화를 강조함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는 가칭 '인문정책국'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인문학 융성을 뒷받침할 독서문화진흥기본계획도 나왔다. 문화를 국민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으로 명시한 문화기본법도 제정됐다. 문화가 드디어 기본권이 되다니, 뿌듯하다.
이쯤 되면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아니다. 요즘 대유행인 말을 빌면, 유감스럽게도 안녕하지 못하다. 올 한 해 문화 예술 동네에서 벌어진 갖가지 불쾌한 사달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먼저 문학. 한국시인협회는 이승만 박정희 등을 찬양하는 시가 수록된 시집을 기획해서 냈다가 여론의 항의로 책을 모두 회수했다. 월간 은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을 싣고 '몽테뉴급 세계적 수필가'라는 찬사를 바친 데 이어 유신과 박정희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이제하, 서정인의 소설 연재를 거부해 빈축을 샀다. 문인들은 문학을 욕 보이는 데 격분했다.
다음 영화. 천안함 침몰 원인을 따져보는 영화 '천안함'이 상영 이틀 만에 내려졌다. 한국영화 사상 초유의 사태다. 어떤 단체가 극렬하게 상영을 반대해서 충돌이 예상된다며 극장 측이 내린 조치다. 정체 불명 단체의 협박이 통하는 세상이라니, 안녕할 수가 없다.
이번엔 미술과 음악. 광주비엔날레에 나온 북한 인공기 디자인 작품이 철거됐다가 다시 거는 소동이 있었다. 광주시의 광복절 기념식은 소년소녀합창단이 입고 나온 체 게바라 티셔츠가 문제가 됐다. 합창단 지휘자는 결국 압력을 못 견뎌 사임했다.
압권은 연말에 국방부가 제공했다. 군대에 들어가는 노래방 기기에서 '아리랑'을 비롯한 민요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그날이 오면' 같은 노래가 불온곡이라며 빠졌다. "북한 가수가 부른 민요라 뺐다"는 국방부 장관의 해명은 "분위기가 쳐져서"라는 국방부 대변인의 말에 뒤집혔다. 같은 한민족의 노래라도 북한이 부르면 불온하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아리랑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을 축하하며 청와대 녹지원에서 아리랑 콘서트까지 연 박 대통령이 머쓱하겠다.
가장 불편하고 시끄럽기로 으뜸은 올해 내내 벌어진 역사 전쟁이다. 일제 식민지배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교학사판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파동이 대표적이다. 역사 왜곡을 따지기 전에 오류가 너무 많아 교과서로는 실격이라는 비판에도 교육과학부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게 해주는 관용을 베풀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최근 2103 문화 결산 보고서를 내면서 '문화 융성 원년'이라는 큰 제목을 달았다. 콘텐츠 수출도 늘고 문화 혜택도 늘고 앞으로 더 좋아질 수 있는 이런저런 기반도 마련했다는 내용이다.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그 자료를 보고 쓴웃음이 나왔다. 융성하긴 했다. 불편한 일, 해괴한 일들이 줄을 이었으니까. 그 사건들 대부분은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돌아보게 하는 것들이다. 그런 자유가 없으면, 문화 융성도 인문학 융성도 없다는 건 너무나 자명하다. 예산을 쓰고 제도를 마련하면 뭐하나. 툭하면 '종북'이라고 몰아붙여 주눅 들게 만드는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문화 예술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아, 가능하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관제 문화, 관제 예술은 융성하리라.
오미환 문화부장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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