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구조조정이 확 바뀌고 있다. 재무구조가 나빠져도 웬만해선 팔지 않으려 하고 팔아도 덜 중요한 자산만 처분하던 것과 달리, 최근 들어선 가급적 빨리, 최대한 알짜자산을 처분하는 쪽으로 180도 변모했다. 동양그룹과 STX그룹의 몰락으로 인해 "타이밍을 놓치면 끝장. 머뭇거려도 끝장"이란 학습효과가 생긴 결과다.
20일 재계와 금융권에 따르면 동양그룹 법정관리 이후 시장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잠재적 위험기업들의 구조조정작업이 사실상 마무리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동부그룹과 한진그룹에 이어 현대그룹도 대규모 자산매각계획을 내놓았다.
이날 현대그룹 소속 현대상선은 컨테이너 박스 1만8,097대를 '세일 앤 리스백'(매각 후 재임대) 방식으로 미국ㆍ홍콩의 리스사에 팔아 536억원을 조달했다고 밝혔다. 지난 1월(1만8,756대)과 6월(3만4,859대)에 이어 올해 들어서만 세 번째로, 총 1,800억원을 확보했다. 현대그룹은 이르면 연내 대규모 재무구조개선계획을 발표할 예정인데, 여기엔 핵심 자산 또는 계열사 매각계획이 포함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한진그룹과 동부그룹은 채권단이 요구한 금액, 시장이 예상한 금액을 훨씬 뛰어 넘는 구조조정안을 내놓았다. 전날 한진그룹 계열 대한항공은 ▦에쓰오일 주식 3,000만주 매각 ▦13대의 노후 항공기 매각 등 총 3조5,000억원 규모의 자산매각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금융당국이나 채권단이 요구한 액수를 크게 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에쓰오일은 대한항공이 안정적 급유선 확보를 위해 2007년 단행한 창사 이래 최대규모의 지분 투자였는데, "대한항공이 에쓰오일까지 포기할 줄은 몰랐다"는 게 시장반응이다.
지난달 17일 동부그룹은 주력사업인 반도체(동부하이텍)와 합금철(동부메탈)을 포기하는 내용의 구조조정안을 내놓았다. 이들 핵심계열사를 포함해 자산매각규모는 총 3조원. 채권단에선 당초 "2조원 정도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동부 측은 오히려 1조원 많은 자산매각안을 내놓은 것이다.
기업들이 이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통 큰' 구조조정을 선택한 건 STX와 동양의 몰락이 준 교훈 때문. 동양그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장의 위험경고가 나왔음에도 계속 회사채 발행을 통해 빚을 늘려갔고, 뒤늦게 구조조정에 착수했지만 동양증권 동양파워 같은 핵심계열사는 뺀 채 작은 매물만 처분하려고 했다. 그 결과, 결국 채권단과 시장의 신뢰를 잃고 그룹 자체가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STX그룹 역시 초기 구조조정이 너무 늦고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다. 한 채권단 관계자는 "지난해 말 STX에너지의 지분 43%를 일본 오릭스에 매각했는데 차라리 그때 경영권에 집착하지 말고 회사전체를 넘겼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며 "뒤늦게 STX팬오션을 내놓았지만 이미 타이밍이 늦어 팔리기 힘든 상태였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이 같은 기업구조조정의 조기화, 대형화 경향을 '가마솥론(論)'에 비유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달궈진 가마솥을 식히려고 물을 부을 때 한 바가지씩 부었다가는 물만 증발해버리고 만다. 처음부터 양동이로 크게 쏟아 부어야만 결국 물도 아끼고 솥도 식힐 수 있다"며 "시장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기업구조조정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부실기업뿐 아니라 정상기업도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서는 분위기다. 롯데는 유동성이 여전히 양호함에도 불구, 내년 2월까지 백화점과 마트 점포건물 17, 18개를 매각해 현금조달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금융투자 리서치센터 신민석 팀장은 "기업 스스로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서는 시장과 당국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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