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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우리 보리 살리기 운동 펼치는 정덕한 바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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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우리 보리 살리기 운동 펼치는 정덕한 바우연구소 소장

입력
2013.12.2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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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옥수수에 점령당한 사료한일이 양대 수입국… 60%나 사줘… 고기 많이 먹으면 살찌는 이유는옥수수 오메가6 성분 인체유입 탓… 보리 발아 사료에는 비만 억제력● 농업 기자, 보리박사 되다다니던 신문사 폐간, 건설업 투신… 제주에 땅 50만평 구입 보리농사옥수수사료단체 등 압력에 쓴맛도● 단보리 나오기까지돼지가 보리사료 먹지 않는 것은 소화 잘 안되고 쓴맛 나기 때문발아과정 뿌리 안나고 싹만 돋게 연구 거듭 끝 8년전 생산 성공

고기 소비가 늘면서 식생활 전반에 걸쳐서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개개인에게는 고기 과잉소비에 따른 비만과 건강불균형이 고민이고 국가적으로는 옥수수 사료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쌀 자급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식량자급률에 비상이 걸린 것. 그런데 고기 소비가 늘면 자동으로 비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료인 옥수수에 많은 오메가6가 고기에 축적된 상태로 인체에 전달되어 비만과 만성질병의 원인인 나쁜 콜레스테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전세계적으로 옥수수 사료가 아닌 전통 사료를 되찾으려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풀 중심의 재래사료를 먹은 축산물은 오메가3가 많아서 많이 먹어도 비만이나 고지혈증에 걸릴 위험이 적다고 한다. 게다가 옥수수 사료 자체를 미국 중심의 곡물 메이저회사들이 공급하면서 한 나라의 식량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경우까지 생겨나, 옥수수를 벗어난 사료를 확보하는 일은 국민 건강과 식량주권을 동시에 되찾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정덕한(71) 바우연구소 소장은 전남 영광에서 단보리, 또는 바우보리로 이름붙인 돼지용 보리사료를 만들고 있다. 보리를 발아시켜 소화력을 높이면서도 맛은 쓰지 않게 만든 특허보리로 옥수수 대신 사료로 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보리사료는 유기농 생산자●소비자협동조합인 한살림이 전량 수매해서 보리돼지를 키우고 있고 이렇게 자란 보리돼지 고기는 더 비싼 값에도 맛이 좋아 인기리에 팔린다. 오히려 국산보리가 부족해서 사료를 더 만들지 못하는 상황. 우리밀 살리기 운동에 기여했던 한살림은 이렇게 우리보리 살리기 운동을 펴고 있고 그 중심에는 단보리를 만든 정 소장이 있다. 그를 만났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는 돼지가 보리를 먹었습니까?

"보리 대신 옥수수 사료가 널리 퍼지게 된 이유가 보리는 옥수수보다 소화가 잘 안돼요. 그러니까 안 먹였지요. 단보리를 만드니까 사료로 쓸 수 있게 됐어요."

-단보리나 바우보리가 보리 종류인가요?

"곡물의 씨앗은 고분자형태로 탄수화물을 갖고 있어서 소화가 잘 안되거든요. 보리를 발아시키면 고분자였던 당이 효소의 작용으로 저분자로 바뀌어 소화가 잘 됩니다. 그런데 종전까지 방식은 발아가 되면서 맛이 아주 써졌어요. 그러니까 소화는 잘 된다고 해도 돼지가 먹지를 않아요. 그런데 뿌리는 나지 않고 어린 눈만 하얗게 돋아나게 발아를 시키면 보리가 쓰지 않고 단 맛이 나거든요. 이 하얀 눈을 백색발아생명체, Vitalised Activated White 라고 이름붙였기 때문에 첫글자를 따서 바우보리라고 불러요. 단보리는 보리가 달다고 부르는 이름이고요."

-어떻게 해서 단보리를 만들게 됐습니까?

"제가 원래 농업전문 기자였어요. 선친이 안양에서 삼일농장이라는 농장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물난리 몇 번 맞더니 망했어요. 집안이 어려워지니까 6남매 중 맏이인 제가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 일을 했어요. 경복고등학교 들어갈 때 성적도 좋았고 또 그때는 보통고시(행정고시의 전신)가 있었으니까 나중에 그걸 치면 되거니 했어요. 그 시험이 나중에 없어졌어요. 농사를 지었어요. 호박을 길러서 두 트럭을 싣고 영등포 시장에 갔는데 하나도 안 팔려요. 중간상의 농간인데 그때는 몰랐어요. 트럭운전사는 수송비를 달라고 윽박지르지, 결국 트럭 두 대를 그냥 내주고 하루 종일 꼴딱 굶고는 비포장 경수국도를 울면서 걸어왔어요. 농업이 살려면 유통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조선일보 안양보급소 총무로 일을 시작했어요. 교통편들이 좋지 않았을 때니까 지국에서 '사고 났습니다' 하고 본사로 알려주면 '대충 뭐뭐만 알아서 연락해다오' 그래요. 그러면 그걸로 기사를 본사에서 쓰는 거지요. 그런 일을 제가 좀 잘했나 봐요. 주재기자를 해보라고 해서 주재기자가 됐어요. 좀 있으니까 데스크로 고등학교 동기가 왔어요. 그때 다른 선배가 대한일보로 간다고 하길래 저도 옮겼어요. 거기서 수원의 농촌진흥청만 출입하는 농업전문기자가 됐어요. 저는 기자실에는 안 가고 도시락 싸가지고 농촌진흥청에 있는 농업도서관으로 주로 출퇴근을 했어요."

-당시 지방 주재기자라면 대접을 받으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을텐데요. (웃음)

"네, 도시락 싸갖고 다니는 기자는 드물었어요. 68년쯤인가. 어느 날 도서관에 있는데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의 전문가인 비첼 박사가 희농1호 문제로 온대요. 희농1호라고, 박정희 대통령의 희자를 따서 농촌진흥청이 신품종 쌀을 개발했다고 아주 떠들썩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농산물 자급에 아주 관심이 많아서 청와대가 쌀을 직접 챙기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비첼 박사가 와서는 차도 안마시고 아주 차갑게 가요. 그래서 비서한테 물었어요. '도둑 잡으러 온 순사 같다'고. 그랬더니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알았냐고 그래요. 무슨 일이 있구나 싶어서 여기 저기 알아봤어요. 나중에 통일벼를 만든 서울대 농대 허문회 박사가 학자적인 양심으로 귀띔을 해줬어요. 쌀 신품종을 만들려면 복교잡을 하고 3대는 내려 가야 하는데 희농1호는 일본이 만든 아끼바레 쌀을 단교잡으로 시늉만 내고 1대만 키우고서 발표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국제미작연구소에서 이런 건 해적행위라고 문제를 지적하려고 온 것이었어요. '희농 1호, 가짜다' 기사를 썼어요. 사흘만에 농촌진흥청장이 날라가고 아주 난리가 났지요. 그때는 농업이 아주 중요할 때라 농촌진흥청에 특종이 많았어요. 당시 월남전에서 군인들이 가져오는 이삿짐에 월남 민달팽이 알이 묻어들어오면서 수원 비행장 주변 습지에 민달팽이가 엄청 많이 번식을 했어요. 이 때문에 공군 추격기 두 대가 활주로에서 미끄러져서 충돌을 했어요. 민달팽이를 없애는 방안을 농촌진흥청에 공군이 의뢰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 기사도 특종이었지만 1판만 쓰고는 기사가 날라갔어요. 군 문제는 극비인데 썼다는 거지요."

-아깝네요.

"그런 일이 많았어요. 그때는 신문사에 중앙정보부 사람 몇 명이 상주했어요.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자한테 직접 뭐라고 하고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으로 끌고도 가고. 저도 희농1호 기사 쓰고 남산에 끌려갔어요. 나라 망신 시켰다고. '녹색혁명의 길은 멀다' 이런 농업기사 시리즈도 기획했는데 이것도 1판만 나가고 못 나갔어요. 제가 데이터를 내보니까 농약도 종자도 비료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턱없이 비쌌거든요. 농업정책은 관리들이 막걸리 몇 잔에 정책이 왔다 갔다 하고 농림부가 제일제당이나 미원 같은 대기업에는 꼼짝도 못하고. 그래도 농촌진흥청에 '소년집단'이라고 부르던 젊은 연구원들과 친했는데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기 위해 잘해보려고 의욕이 대단했어요. 막걸리 마시면서 토론도 많이 하고 많이 배우고."

-그 분들이랑 이야기를 하면서 보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건가요?

"그때는 쌀 자급도 안되던 시절이라 식량자급을 하려면 쌀과 보리가 함께 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1972년에 미국이 중국과 교류를 시작했잖아요. 이때부터 미국산 옥수수를 중국에 수출하려다가 실패했어요. 모택동이 정치일선에서는 물러나 있었지만 '옥수수는 제2의 아편이다' 이러면서 절대로 미국산 옥수수를 못 들여오게 했대요. 모택동은 1인당 돼지 세 마리를 키워야 식량자급이 된다고 말했는데 중국이 돼지 세 마리를 제터 먹이로 키우는 정신으로 살아온 것이 오늘날 중국을 만든 거예요.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모택동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지만 일본책을 보면 이런 게 다 나왔어요. 그래서 보리로 식량자급에 힘쓰자 생각한 거지요."

-제터 먹이요?

"신토불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제터 먹이라는 말을 쓰자고 해요. 제 땅에서 나는 먹을 것이라는 뜻이지요. 스코트랜드가 오트(귀리) 밖에 먹을 것이 없었지만 잉글랜드의 밀과 빵을 부러워하지 않고 제 땅에서 나는 오트를 계속 연구한 결과 지금은 잉글랜드 사람들도 건강을 위해서 오트밀을 먹잖아요. 오트에서 스카치 위스키도 나와서 전세계에 팔리고요. 내년에 스코트랜드가 잉글랜드에서 독립하는 걸 국민투표로 결정하겠다고 하는데 먹을 것은 오트밖에 없는 사람들이 제터 먹이인 오트를 귀중하게 생각한 결과 이렇게까지 된 거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보리가 제터 먹이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보리를 직접 연구하게 된 건가요?

"(73년에) 대한일보가 폐간되면서 75년부터 건설산업에 뛰어들었어요. 삼일농장 대신 대토로 받은 밭에 동생들을 시켜서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주택단지가 들어서게 됐다고 해요. 집장사를 시작했어요. 88년에 성원아파트 짓는 성원산업개발에 팔았는데 동덕개발이라고 아주 잘 됐어요. 기자 출신으로 돈 버는 사람이 드무니까 선데이서울에 예비재벌로도 소개된 적도 있어요. 하하하. 돈은 그걸로 벌지만 제 생각은 계속 농촌을 살리자, 농촌을 살리려면 보리를 살려야 한다, 그래서 돈만 벌면 제주도에 땅을 샀어요. 성산포 가까이 중산간 지대에 6년에 걸쳐서 50만평을 샀어요. 보리농사를 지으려고요.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던 해에 우리나라 보리생산량이 100만톤까지 올라갔어요.(통계로는 75년에 170만톤이 최고치) 그때 옥수수 수입량이 200만톤이던 시절이었어요. 제주도 중산간에 보리밭을 만들면 옥수수 수입 안해도 된다, 그래서 했어요. 5억 정도 들여서 개간을 잘했더니 이게 화제가 됐어요. 82년쯤인데 언론에서 '사료자급의 길이 열렸다' 대대적으로 보도도 되고. 그랬더니 농림부 양곡과에서 보자고 해요. 올라갔더니 사료곡물협회 과장이 와있어요. 주머니에 손을 딱 꽂고 '당신네 보리 가지고 자급사료를 해? 그럼 우리 옥수수 필요없겠네. 다음달부터 옥수수 끊겠다'고. 그러니까 양곡과장이 쩔쩔 매요. 옥수수 사료가 끊어지면 축산농가가 못 견디거든요. 83년인가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쌀수입을 사인하고 온 것도 사실은 옥수수를 받아오기 위해 쌀을 끼워 팔겠다는 것을 받아들인 겁니다."

-사실은 미국의 가장 큰 수출품은 쌀이 아니라 옥수수다?

"그럼요. 지금 미국 옥수수의 2대 수출국이 일본과 한국이에요. 이 두 나라에서 미국 옥수수의 60%를 팔아줘요. 보리만 자급되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서 제가 그때 미국 대사관 앞에서 'no America corn'(미국 옥수수 반대)하고 1인 시위도 하고 그랬어요. 곧바로 잡혀갔지만."

-그래서 보리사료화를 중단했나요?

"그러더니 종자를 안주더라고요. 종자보급소에서 주기로 다 약속까지 했는데 갑자기 '사람 먹을 것도 모자라는데 사료 만든다고 보리 쓸 수 없지 않느냐'고 해요. 개간한다고 지역농협에서 빌린 돈도 빨리 안 갚으면 압류하겠다고 하고. 제일 큰 이유는 발아보리사료를 돼지가 안 먹어요. 유럽에서 공부한 소장파 학자들이 보리를 발아시키면 소화흡수율이 높아진다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요. 발아를 하면 싹도 돋지만 뿌리도 나거든요. 식물은 뿌리가 나기 시작하면 동물한테 먹히지 않기 위해 호르데닌이라는 아주 쓴 알카로이드 물질을 내뿜어요. 그러니까 돼지가 먹지를 않는 거에요. 그게 제일 치명적이었어요."

-단보리라면서요?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게 단보리인 거지요. 처음에는 완전히 실망해서 제주도 땅도 다 팔아버리고 집에서 만주어 연구만 했어요. 그런데 옥수수 사료가 점점 더 늘어나니까 보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에요. 90년대 초부터 다시 해남으로 보리를 보러 다녔어요. 돈도 없고 연구자들 말 듣고 실패했으니 쓰지 않게 사료를 만드는 법을 직접 찾아보자 싶었어요. 보리를 물에 적셔 상자 안에 담아서는 아파트 계단에 놓아두었거든요. 담배 피러 나가면 들여다보는 거지요. 2002년쯤인가 어느 날 보니까 반딧불처럼 하얗게 빛이 나요. 자세히 살펴보니까 뿌리는 나지 않고 싹만 돋아서 그런 거예요. 이것만 보온밥통에 넣고 8시간을 두었어요. 그랬더니 단맛이 나요. 아, 뿌리가 나지 않고 싹만 돋게 하면 단보리가 되는구나. 그러면 어떤 조건에서 늘 그렇게 만들 수가 있을까. 그걸 완전히 알아낸 것이 2005년이에요."

-그렇게 해서 돼지를 주니까 잘 먹던가요?

"네. 짊어지고 가서 돼지를 주니까 잘 먹어요. 소화도 아주 잘돼요. 단국대 돼지영양분석실의 김인호 박사님한테 의뢰해서 조사했더니 소화율이 94%나 돼요. 적게 먹어도 영양이 다 흡수가 되는 거지요. 사료값이 좀 비싸더라도 덜 먹이면 되니까 크게 비싼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복합사료에 옥수수를 65% 넣는데 보리사료로는 40%만 넣어도 되거든요. 직접 특허를 내다보니까 2008년에야 특허를 냈고요. 그때도 단맥주 원료가 된다는 조항은 맥주회사하고 시비가 붙을 수 있으니 빼라고 특허청에서 권유하더라고요. 절대로 뺄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이 더 걸렸어요. ○○맥주랑 그 문제를 협의하던 중에 ○○맥주가 맥아판매를 하는 외국계 회사에 팔리면서 중단이 됐어요. 하하"

-보리는 충분히 나옵니까? 남부지방에서는 겨울에 2모작으로도 가능할텐데.

"저희 공장만 해도 월 100톤은 생산할 수 있는데 보리가 없어서 60톤만 만들어요. 2009년에 정부가 보리를 주곡에서 빼버리고 2012년에는 수매도 중단하면서 생산량도 크게 떨어졌어요.(2012년 5만8,000톤 한살림 자료) 쌀보리는 남부지방에서만 되지만 농촌진흥청에서 귀리와 토종 겉보리를 교잡해서 만든 영양보리는 강원도 같은 서늘한 지역에서도 키울수 있거든요. 농민들이 좀더 보리를 많이 길렀으면 좋겠어요."

-이 방법을 다른 곳에 알려주면 더 널리 보급이 될텐데요.

"영광군이 저를 이곳으로 유치하더니 농협이랑 협조를 해서 그 방법을 널리 알리라고 해요. 그랬는데 농협은 수입보리로 단보리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 하겠다고 했어요. 식량자급을 위해서 시작한 것이 단보리 생산인데 수입보리를 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농협이 없어져야 농촌이 산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에요. 수입옥수수가 들어있지 않을 것, 수입보리를 쓰지 않을 것, 이 두 가지만 지키면 언제든 어떤 업체든 같이 할 생각이 있어요. 우리 보리를 살려야 외국 농산물에 코가 꿰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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