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배우 김소희는 종종 연출가 이윤택의 페르소나라 불린다. 이윤택 연출이 구상하는 연극적 캐릭터가 그의 몸을 빌려 완성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29일까지 서울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혜경궁 홍씨'는 이윤택 연출가의 특색 있는 역사 읽기, 그리고 김소희와의 만남으로 개막전부터 관심을 끌어온 작품이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의 삶과 그 중심에 섰던 혜경궁 홍씨를 한 판 굿으로 불러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한을 풀어주는 제례의식인 이 작품에서 김소희에 대한 기대와 이윤택에 대한 오랜 믿음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이 연극은 10대부터 6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의 홍씨를 연기한 김소희가 완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윤택 연출은 공연을 앞두고 "김소희는 심리적 화술에 있어 최고의 배우"라 말하며 그에 대한 신뢰를 내비쳤다. 막이 오르면 환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김소희)는 아들 정조(정태준)를 앞에 두고 사도세자(박정무)의 죽음 이후 그의 집안이 견뎌야 했던 한을 쏟아낸다. 어르고 달래는 아들 앞에서 노인으로 분한 김소희는 격분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일순간 웃음을 짓고 아들 품에 무너지는, 나약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오랜 세월 버텨온 여인의 두 얼굴을 철저히 소화했다. 꿈자리로 찾아 들어오는 남편 사도세자의 혼령에 안겨 젊은 시절을 떠올릴 때면 홍안의 처녀라도 된 양 얼굴을 붉히다가 주책없는 노파로 가파르게 캐릭터를 옮겨 탄다. 하룻밤 꿈속에서 초례를 치르던 시절로 돌아가는 김소희는 영조(전성환)앞에서 영민하게 남편을 도와주는 열살 소녀를 천연덕스럽게 표현하기도 한다.
무대는 오직 한 지점, 사도세자가 뒤주 안으로 들어가 죽임을 당하는 절정의 장면으로 치닫는다. 삶의 무거운 짐을 상징하는 뒤주를 등지고 영조가 무대의 중심에 서면 오른쪽으로 사도세자와 궁녀들, 그리고 왼쪽에 혜경궁 홍씨와 그의 아버지 홍봉한(이원희)이 둥그렇게 둘러선다. 연출은 이 장면에서 혜경궁 홍씨의 관점만이 아닌, 모든 등장인물의 다양한 반론을 들을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한다. 어째서 영조는 아들을 죽여야 했는지, 사도세자의 생모, 그리고 홍봉한은 무슨 이유로 막아서지 않았는지, 결정적으로 홍씨는 왜 지아비가 아닌 아들을 택했는지를 관객은 관찰자의 관점으로 넓게 조망할 수 있다. 하지만 김소희의 열연이 두드러진 탓인지, 객석의 시선은 모든 캐릭터에 평준하게 다가서지 꽂히지 못한다. 심리 묘사가 탁월한 배우 한 명의 영역이 의외로 넓게 차지했기 때문은 아닐까.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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