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우리나라 김장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로써 김치와 기무치의 원조 경쟁은 무의미해졌고 한국은 당당한 김치 종주국으로 전세계의 인정을 받게 됐다.
국민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고 지방자치단체들이 축하행사를 준비하며 김치 업체가 할인 행사를 기획하는 동안 모두가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등재된 것은 김치가 아니라 김장문화라는 것. 김장문화가 공식 등재되기 전인 지난달 초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경고문을 전달한 바 있다. 등재 후보는 김치가 아닌 김장문화이며, 만약 김치가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처럼 알려져 상업적으로 이용될 경우 등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등재 후보를 '김치와 김장문화'라고 알려왔던 문화재청은 부랴부랴 '김장문화'로 말을 바꾸고 김치란 단어가 전면에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에 나섰다.
유네스코가 유난을 떠는 이유는 꼭 상업화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유네스코의 정의에 따르면 인류무형유산은 공동체와 집단이 자신들의 환경, 자연, 역사의 상호작용에 따라 끊임없이 재창조해온 각종 지식과 기술, 문화적 표현을 뜻한다. 여기서 핵심은 공동체,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재창조 즉 전승이다.
김장문화 역시 김치 담그는 행위를 통해 가족 간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는 것, 이웃끼리 김치를 나누어 먹는 풍습을 통해 자연스레 나눔의 정신을 실천해왔다는 것이 등재 성공의 원인이었다. 유네스코가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것은 벌건 배춧잎의 우수한 맛과 건강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통된 그림으로 떠올릴 법한 김장의 오래된 풍경이다. 산처럼 쌓인 절인 배추, 모처럼 방에서 나온 아들이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고무 다라이, 부엌에서 수육을 삶으며 한 점씩 집어 먹는 딸, 막 무친 겉절이를 찢어 입에 넣어주는 엄마의 고무장갑, 플라스틱 통에 차곡차곡 제 몫을 챙기는 옆집 아줌마.
이처럼 인류 문화의 한 풍경을 차지하는 식문화 중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은 프랑스 미식문화, 남유럽 국가들의 지중해식 식단, 북크로아티아의 생강빵 제조기술 등 5개다. 여기에 올해 한국의 김장 문화, 터키의 커피 문화와 전통, 일본의 와쇼쿠(정월 음식) 문화가 등재에 성공하면서 8개로 늘었다.
이 중 터키의 커피 문화는 한국의 김장문화와 여러모로 닮은 꼴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기술이 이어진다는 점,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지표라는 점, 그리고 음식 솜씨를 가늠하는 첫 번째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고의 커피 선생은 엄마"
"한국에 손맛이라는 말이 있죠? 터키 커피를 만드는 데도 손맛이 있어야 돼요. 같은 도구와 재료로 만들어도 손맛 있는 사람이 끓여야 맛있는 커피가 나와요."
서울 역삼동 이스탄불 문화원에서 만난 후세인 이지트 원장은 커피 열매가 한 알도 나지 않는 터키가 커피 문화를 유네스코에 등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커피를 만들고 소비하는 특유의 방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터키식 커피는 원두가루를 여과지에 통과시키거나 압력으로 추출하는 서구식 커피와 달리 가루를 그대로 물과 함께 끓여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커피 제조법으로, 굉장히 진한 맛이 나기 때문에 설탕을 넣어 마시기도 한다.
커피 제조에 필요한 준비물은 원두, 물, 설탕, 손잡이가 달린 좁은 냄비 형태의 체즈베(cezve), 그리고 터키식 커피잔인 핀잔(fincan)이다. 볶은 원두를 사서 분쇄하는 사람도 있지만 터키 가정의 상당수는 커피를 만들기 직전에 직접 생두를 볶는다. 때문에 터키 주부들에게 생두를 신선하게 관리하는 것은 중요한 집안일 중 하나다. 철판에 볶은 원두는 에스프레소에 쓰이는 것보다 더 곱게 분쇄한다. 체즈베에 물 1컵당 커피가루 1티스푼을 넣고 입맛대로 설탕을 첨가해 약한 불에 올린다. 만들기 쉬워 보이지만 온도 조절에 실패하면 터키 커피의 핵심인 거품을 만들 수 없다. '커피를 잘 끓이는 여자가 모든 요리를 잘 한다'고 믿는 터키인들이 잘 끓인 커피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거품의 풍성함이다. 거품은 부드러운 식감을 제공하고 커피가 오랫동안 식지 않게 돕는다.
동으로 만들어진 체즈베는 온도가 급격히 오르지 않기 때문에 뭉근히 끓이면서 거품을 내기에 제격이다. 커피를 끓이다가 거품이 올라오면 숟가락으로 거품을 떠서 잔에 담은 뒤 다시 불에 올려 한 번 더 끓인다. 완성된 커피는 에스프레소 잔보다 조금 큰 핀잔에 붓고, 마시기 전 물로 입 안을 헹궈 다른 맛을 없앤 뒤 커피를 즐긴다.
"커피를 제대로 끓이려면 엄마한테 배우는 게 최고예요." 터키 가정의 커피 맛은 한국의 장 맛처럼 집집마다 특색이 있다. 딸들은 어깨너머로 엄마가 커피 끓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고, 이때부터 갈고 닦은 솜씨는 후에 상견례 자리에서 시험대에 오른다. 터키에서 남녀가 결혼을 약속하면 식을 올리기 전 신랑 쪽 가족이 신부네 집을 방문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때 커피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한다. 신랑 쪽은 커피의 맛을 통해 얼마나 야무진 며느리가 들어올 것인지 살피고, 신부 쪽은 신랑의 준수함 여부에 따라 커피의 맛을 조절한다. 중매결혼이 성행했던 과거에는 마음에 안 드는 신랑이 오면 신부가 커피에 설탕 대신 소금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단순한 심술이 아니라 진지한 거절의 표시로, 소금 커피를 마신 신랑 쪽 가족은 그대로 일어나 나가야 했다.
"터키에서는 커피 한 잔에 40년의 추억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커피를 마신 사람과는 앞으로 40년 간 인연을 지속해야 한다는 뜻이죠. 터키 사람들이 커피를 제안하는 것은 오랜 우정을 약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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