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10월20일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전권회의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선거다. 사무총장과 차장, 그리고 3개 총국장(표준화 무선통신 정보통신) 다섯 자리에 대한 회원국들의 투표가 이뤄진다. 이 다섯 자리는 전세계 정보통신기술(ICT)의 흐름을 좌우하는 자리여서, 통상 ITC분야의 '5성'에 비유된다.
직급상으론 사무총장이 가장 주목 받지만, 실질적으로 알짜배기 자리는 표준화총국장이다. 표준화총국이 어떤 통신기술과 전송방식을 세계 표준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정책방향이 달라진다. 또 기업들은 표준화에 맞춰 제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표준화총국의 결정에 따라 수십억~수백억 달러의 시장이 움직이게 된다. 실제로 휴대폰 충전단자 모양 등도 ITU 표준화총국에서 국제표준을 결정했다.
ITU의 핵심직책인 표준화총국을 이끄는 총국장 자리에 우리나라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카이스트 IT융합연구소의 이재섭(53) 연구위원이다. 워낙 중요한 자리인 만큼 정부와 학계, 산업계에서도 그의 당선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만약 그가 당선된다면 ITU 역사상 한국인 최고위직이 되며, 글로벌 ICT 기술의 의제를 실질적으로 우리나라가 주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 위원은 17일 본지 인터뷰에서 "(당선이 된다면) 무엇보다 국제 표준화 작업과 궤를 같이 해 우리나라 통신기술과 정책을 이끌어 갈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표준화총국에서 정한 ITU 표준은 구속력 없는 권고안이긴 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으면 세계적 기술흐름에서 고립되기 때문에 사실상 강제효과를 지닌다.
이 위원은 25년 동안 ITU에서 표준화 작업을 담당했던 전 세계 몇 명 되지 않는 전문가다. 사실 그가 ITU 표준화 작업에 발을 담근 데에는 나름 뼈아픈 기억이 있다. 건국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석사를 마친 그는 1986년부터 2004년까지 KT 연구개발본부에서 전략기획부장으로 일했다. 그 시절 1987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ITU 표준화 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IT 후진국이었다. 각 국이 자국 기술을 세계 표준에 포함시키려고 총력전을 펴는데, 우리나라는 그저 쳐다 볼 뿐이었다. 이 위원은 "망신스럽기도 했고, 기술격차를 피부로 느껴 충격도 컸다"며 "그 때부터 ITU 표준화 회의에 꼭 다시 오고 말겠다는 독기를 품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92년 그는 ITU 표준화 스터디그룹 에디터가 됐다. 에디터란 각국 정부에 전달하는 ITU 표준 권고안을 만드는 자리. 4년 뒤 표준화 스터디그룹 부의장이 됐고 2009년부터 미래네트워크 스터디그룹(SG13) 의장을 맡고 있다.
현재 ITU에서 20년 이상 표준화 작업을 담당한 인물은 이 위원을 포함해 손에 꼽을 정도. 그만큼 그는 전세계 IT 표준화 작업의 상징 같은 존재로, 193개 ITU 회원국 대표들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그 동안 활동 덕분에 ITU에서 대한민국 없는 IT는 상상할 수 없게 됐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그의 활동에 힘입어 ITU에서 정한 차세대 통신망(NGN)과 인터넷TV 표준 등에는 우리나라 기술이 대부분 반영됐다.
이번 투표에서 그의 선출가능성은 매우 높다. 다행히 경쟁자는 아직까지 ITU 표준화 작업을 거의 해보지 않은 터키 출신 후보 1명 뿐이다.
ITU 표준화총국장 후보신청은 내년 6월에 마감, 내년 10월 전권회의에서 3주에 걸쳐 투표를 하게 된다. 이 위원은 "당선 기준이 참석자의 과반수 이상 득표"라며 "표준화총국장 선출은 연구원으로서 정점을 찍을 수 있는 기회여서 기대와 함께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글=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사진=조영호기자 you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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