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차례에 걸쳐 개체 번식을 했다. 우리 종(種)의 새끼를 일컫는'아이'라는 명사는 내 머리 속에서 늘 단수가 아니라 복수('child'가 아니라 'children')의 형태로 존재했던 탓에 출산이라는 건 '하거나, 하지 않거나'의 두 가지 경우밖에 없으며, 한다면 번식의 최소 개체 수는 당연히 둘 이상이라고 여겨왔다. 둘째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주변의 또래 여성들이 보였던 그 근심 어린 반응들이라니. "일은 그만하려고?" 그때만 해도 꽤나 천진난만했던 것 같다. "아니. 계속할 건데, 왜?" 이후 나는 '다산의 여왕'내지는 '출산의 요정'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볼 때마다 임신이냐"는, 참아낸 게 스스로도 대견한 모욕적 언사를 들은 일도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둘째를 낳는다는 것의 의미를 꽤 자주 열심히 생각했던 것은 이런 개인적 사정 때문일 것이다. 나만 세상 물정 모르고 둘이나 낳은 것 아닌가 싶은 막연한 불안은 주로 정부의 출산율 발표를 보면 새삼스레 엄습하곤 하는데, 올해의 경우 유독 심했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라는 거야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지만, 2009년 1.15명에서 지난해 1.3명으로 느리게나마 꾸준히 증가했던 출산율이 올해 다시 1.1명대로 떨어질 것 같다는 전망이었다. 여느 해처럼 '출산율 곤두박질… 경제에 큰 부담 우려' '낮은 출산율, 국가의 미래 어두워' 같은 내용의 기사가 쏟아졌다.
다산으로 진정한 애국을 실천하고 있다는 주변의 평가와는 딴판으로, 나는 여성들의 '출산파업'을 지지한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는 상상력 부족에 육아도 '아웃소싱'이 가능한 분야라는 얄팍한 인간 이해 때문에 덜컥 둘이나 낳았을 뿐이다.(얘들아, 후회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니 엄마를 오해 말아다오!). 저출산은 노동인구를 감소시키고 내수소비를 줄여 결국 국가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는 저 준엄한 논리. 우리가 낳는 아이들은 이 논리 속에서 언제라도 쉽게 쓰고 쉽게 자를 수 있는 '유연한' 저임금 노동자일 뿐이며, 한 달 88만원을 벌고도 기업의 수익 창출에 이바지해야 하는, 오로지 소비의 순간에만 평등을 체험하는 탈계급 소비자일 뿐이다. 저 논리의 주창자들이 설마하니 내 아이들이 자아를 실현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노동으로 인한 재화의 축적과 삶의 기반 확보 방안을 한 순간이나마 고려해 봤을까.
다윈의 언어를 흉내내자면,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대한민국이라는 서식지가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이 서식지의 인간 종이 개체 수 조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낮은 출산율은 이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두운 이 나라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뿐이다.
올 한 해 문학 담당을 하면서 읽었던 국내 소설 중에는 유독 엄마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려는 자식들이 주인공인 장편소설이 많았다. 안보윤의 과 이재찬의 , 황정은의 등 동일 모티프를 다룬 장편들이 몇 달 상간으로 쏟아졌다. 왜 한국문학의 서사충동이 오이디푸스적인 '살부(殺父)'에서 까닭 모를 '살모(殺母)'로 옮겨간 것인지 물었을 때 미혼인 황정은씨가 답했다. 이 사회가 출구 없는 지옥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잡으며 그 원인을 추궁하고자 하는 서사적 욕망이 소설가들에게 움텄고, 그 원인을 소급하고 소급하다 무의식 차원에서 '어머니, 왜 저를 함부로 낳으셨나요'의 최종심급에까지 이른 것 같다는 해석이었다.
에세이스트 전혜린은 라는 책에서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한번 여기 와서 살아보겠냐고 묻지도 않은 채 이 고통스런 세상에 함부로 자식을 내놓은 대가"라고 적었다. 1960년대에는 실존적 고뇌였을 이 명제가 이제는 그야말로 축자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자식들에게 '그래도 태어난 게 나았다'는 말을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오늘날의 젊은 엄마들- 그 역시 한낱 생산인력에 소비자일 뿐인-은 슬프고도 두렵다.
박선영 문화부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