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에 풍찬노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일반 노숙자는 아닙니다. 집도 있고 가정도 있고 일터도 있습니다.
서울 서초동 국제전자센터. 용산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전자제품 매장입니다.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진 15일 국제전자센터 앞엔 '노숙자 아닌 노숙자'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17일 국내 출시되는 소니의 차세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PS)4'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사기 위해 벌써부터 줄을 선 그야말로 '게임 마니아'들이지요.
이 중 첫 번째 대기자인 홍석민(33세)씨는 11일부터 노숙에 들어갔습니다. 출시일까지 무려 6박7일 일정이지요.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에, 그 사이 폭설까지 왔는데도, 홍 씨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옷을 갈아 입거나 화장실에 갈 때는 부인이 와서 대신 자리를 지킨다고 합니다.
상가가 밀집된 대형건물이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원래는 천막도 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홍 씨도 처음엔 두꺼운 외투, 은박지, 그리고 핫팩으로 밤을 버텼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큰 사고라도 날 것 같아,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코리아(SCEK) 측은 서초구청 및 국제전자센터측에 양해를 얻어 천막과 석유난로를 제공했습니다. 천막이 생기자 대기자들이 가세, 15일 오후 현재 8명이 노숙에 합류했습니다.
사실 SCEK측도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출시 하루 전 밤을 새우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일주일 노숙은 해외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와우치 시로 SCEK 사장이 현장을 직접 찾아와 감사와 걱정의 뜻을 전하면서 방한용품까지 주고 갔습니다. SCEK 관계자는 "일본 본사의 PS4 개발자들도 현장을 보고 싶어할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홍 씨가 이 한겨울에 일주일 노숙을 결심한 건, 단순히 '1호 구매자'가 되려는 욕심 때문은 아닙니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액세서리 도매상을 하는 홍 씨는 "(게임을 중독으로 보고 규제부터 하려는) 세간의 부정적 시각을 씻고 순수한 열정을 가진 게임 애호가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노숙은 일종의 시위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소식이 게임 커뮤니티 '루리웹' 등을 타고 알려지면서 응원군까지 등장했습니다. 새벽에 촬영을 마치고 지나던 배우 심영탁씨 등 약 180명이 천막을 찾아와 "열정이 대단하다"며 음식 등을 전달하고 갔습니다.
SCEK는 17일 오후 6시20분 국제전자센터 앞에서 출시행사를 갖고, 444명에게 현장 판매를 하면서 1호 구매자에게 제품을 전달하는 행사를 가질 계획입니다. 여기에 노숙을 마다 않은 열정을 보인 홍 씨에게 감동해 별도의 감사를 전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