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남한테 고나리 당하고 싶다." "대다나다 ASKY!!! 넌씨눈 돋네." 외계어처럼 보이는 이 대화는 대학생 조효정(19ㆍ가명)양이 얼마 전 카카오톡에서 친구와 주고받은 얘기다. '썸남'은 사귀기 전 단계에 있는 남자친구를 의미하고 '고나리'는 관리를 뜻한다. '대다나다'는 '대단하다'를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은 말이고, 'ASKY'는 '애인이 안 생겨요'의 알파벳 약어다. '넌씨눈'은 '넌 씨X 모르는 척하지 마라'는 말이며 '돋네'는 '~하다'라는 뜻이다. 대화 내용을 풀어보면 "애인 사이로 발전하고 싶은 남자에게 관심을 받고 싶다" "대단하다. 애인이 안 생겨! 넌 아무리 눈치를 줘도 못 알아채고 있어"로 이해할 수 있다.
거친 언어 주변환경 영향 커
국적 불명인 청소년들의 언어가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유행어나 은어, 신조어는 외계어로 변한 지 오래며, 최근 들어서는 욕설이나 비속어의 사용도 늘고 있다. 주로 '존예(정말 예쁘다)' '버카충(버스카드충전)' '에바(오버의 변형)' '엄크(엄마크리ㆍ엄마가 갑자기 들어옴)' 등 줄임말을 사용하거나, 'ㄱㅅㄱ(개XX)' 'ㅅㅂ(시X)' 'ㅈㄴ(존X)' 'ㅈㄹ(지랄)' 등 초성만 사용하는 욕설을 즐긴다. 조양은 "우리끼리 은어를 사용할 때도 룰이 있다. 보통 넌씨눈 같은 건 귀여운 욕에 속하고, ASKY는 욕처럼 발음하는 게 포인트다. 부모님을 들먹이며 욕을 하는 '패드립(패륜 아이들의 행동)'은 욕설 중 최고로 친다"고 알려줬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달 26일부터 나흘 동안 전국의 만 15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우리말 사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청소년의 96%가 평상시에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한다고 했고, 평상시에 욕설이나 비속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청소년은 4%에 불과했다. 전체 응답자의 69.4%가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것을 감안하면 청소년들의 언어파괴 현상은 심각하다.
청소년들이 비속어나 욕설을 사용하는 이유는 뭘까. 응답자의 42.6%가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16.6%가 '상대방이 사용해서', 15.0%가 '웃기거나 재미가 있어서', 6.6%가 '의미를 모르고 습관처럼 사용한다'고 답했다.
비속어 사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론 전체 응답자의 56.2%가 인터넷(카페, 게시판 등)을 꼽았다. 방송 25.4%, SNS 16.2%, 신문 2.2% 순이다. 방송에서 비속어나 욕설을 사용하는 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체 응답자의 56.7%는 '방송에서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고 답했고, 27.1%는 '욕설이나 비속어를 쓰는 것은 괜찮지만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있다', 15.6%는 '재미나 현실감을 위해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야 너 뭐 처먹냐, 뭐 처먹냐고. 이런 개새끼야, 니가 그것을 뭣 한다고 처먹고 지랄이여. 와 이 어처구니없는 새끼 좀 보소. 니 오늘 나한테 뒤졌어. 확 창자를 빼가꼬 젓갈을 담가불랑께."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조윤진(도희)의 대사다. 도희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단숨에 '국민 욕동생'으로 떠올랐다. 10여년 전 배우 문근영에게 '국민 여동생'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준 것에 비하면, 살벌한 진화다. 도희 이전에 '국민 욕동생'으로 불리던 개그우먼 김슬기는 '욕 연기'를 내세워 CF도 섭렵할 정도다. 방송에서 욕설을 '삐리리' 효과음으로 처리하는 건 흔한 일이 됐다.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 심리
욕설이나 비속어는 청소년들에게 '재미'일 뿐이다. 고교생 최한철(16ㆍ가명)군은 최근 카카오톡의 메인 프로필을 도희 사진으로 바꾸었다. 소개말에는 '뭐하러 처먹냐'고 적었다. 최군은 요즘 학원이 끝나고 집에 오면 극중에서 도희가 욕을 하는 장면만 골라 편집된 영상을 찾아보며 따라하고 있다. 최군은 "도희처럼 욕을 쫄깃쫄깃하고 찰지게 하고 싶어서 자꾸만 보게 된다. 사투리랑 욕이 섞이니까 더 귀엽게 느껴진다"면서 "엄마랑 아빠를 거들먹거리는 '패드립'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강기수 동아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는 "2000년대 초반 영화 '주유소습격사건'과 '친구'가 큰 인기를 끈 이후 방송이나 영화에서 욕설이나 비속어가 많이 사용되기 시작됐다. 또래문화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청소년들이 문화자본에서 배우게 된 계기로 볼 수 있다. 요즘은 영화나 TV 프로그램뿐 아니라 웹툰, 게임, 인터넷커뮤니티 등 다양한 곳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청소년들의 언어습관은 주로 또래문화에서 형성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미디어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청소년 개개인이 미디어를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그걸 또래문화에서 나누면서 확산되는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기성세대가 제공하는 미디어의 영향이 절대적인 만큼, 기성세대가 청소년의 언어습관을 오염시켜 놓고 이제 와서 청소년들만 나무라는 건 무책임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청소년들이 입이 거칠어지게 된 '현상'이 아니라, 이들의 불안한 심리상태에 있다. 어른들과 사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많은 청소년들이 일상 언어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욕설과 비속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조양은 "친구들과의 사이에선 일단 센 척을 해야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다. 욕설을 사용하는 건 꺼려지지만 줄임말로 얘기하면 친구들은 다 알아들으니깐 괜찮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청소년들의 말이 거칠어진 건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인간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는 보통의 말로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욕은 인간의 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말을 더 강력하게 전달한다. 불만이 많은 청소년들이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기 위한 낱말이나 새로운 표현이 필요한데, 이때 욕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 교수는 "청소년들이 욕을 많이 하는 현상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할 순 없지만 무조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꾸중하는 건 곤란하다. 일단 청소년들이 언어문화와 욕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뜻도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욕을 했다고 '벌점'부터 매기는 제도가 아니라 욕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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