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TPP) 조기가입에 미국이 제동을 걸고 있다.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그러려면 미국측 통상요구부터 수용하라는 것이다. TPP 무료입장은 불가능하며, 최소한의 입장료는 받겠다는 얘기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당시 미국측 대표였던 웬디 커틀러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보는 12일(현지시간) 워싱턴DC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열린 '한국의 TPP 참여'관련 세미나에 참석, "12개국이 진행 중인 TPP 협상은 사실상 엔드 게임(end gameㆍ막바지) 단계라 지금 한국을 포함해 새로운 국가를 참여시키는 건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TPP 문호는 열어두겠지만, 최소한 창립멤버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우태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은 한 언론인터뷰에서 "미국이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며 "현재 회원국들과 예비 양자협의를 진행 중이니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여전히 TPP 창립멤버로 들어가겠다는 뜻을 접지 않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TPP 가입에 대해 '유료입장'방침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커틀러 대표보도 한국이 TPP에 가입하려면 '뭔가 성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한국은 TPP 가입에 앞서 FTA 이행과 관련한 우려 사항부터 해결해야 한다"며 "한국은 높은 수준의 FTA 이행에 합의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TPP 멤버가 될 수 있지만 그와 관계없이 의회와 이해당사자들이 우려하는 양자간 현안들을 신속히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행정부의 고위당국자가 공개적으로 한국측에 대해 FTA 이행 불만을 표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커틀러 대표보가 지적한 '의회와 이해당사자들의 우려사항'은 ▦원산지표시 ▦금융서비스 자료공유 ▦자동차분야 비관세 장벽 ▦유기농제품 인증 등 총 4가지다. 원산지표시는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까다로운 인증을 요구해 미국기업이 FTA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미국측 불만이다. 금융정보 공유는 한미FTA 발효 2년에 맞춰 미국계 금융회사가 수집한 고객의 금융정보를 미국 본사에 이전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인데, 미국측은 "한국의 국내규정이 모호해 실제 이행률이 너무 낮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동차 분야에서 한국정부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경차나 소형차 구매자에게 50만~30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중ㆍ대형차에는 50만~300만원의 부담금을 물리는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대형차 생산이 많은 미국 자동차업계는 이를 비관세장벽으로 규정,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유기농 인증은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것으로 미국은 자국산 농산물 수출에 차질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 통상 전문가는 "미 행정부는 한미FTA 타결 이후 무역역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부담과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며 "적어도 이런 조치들이라도 해결해야 의회와 업계를 설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미국측은 한국의 TPP 가입과 양국간 통상현안을 연계시키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 확실시된다. 오버비 미 상공회의소 부회장이 전날 '한미관계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한국이 FTA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서는 TPP에 가입하는 '프리패스(무임승차권)'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양국 무역관계에 정통한 한 인사는 "당초엔 일본과의 협상이 가장 힘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미국이 TPP가입 조건을 까다롭게 내걸고 있다"며 "몇 개라도 수용하지 않으면 TPP 가입자체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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