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분신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던 강기훈씨 재심재판에서 강씨의 무죄 주장에 부합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의 감정결과가 나왔다. 유서와 김씨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노트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결론이 이미 나왔지만 검찰은 그 동안 전대협 노트의 조작가능성을 들어 강씨의 무죄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과수가 이번에 전대협 노트와 김씨의 낙서장 필체가 매우 유사하다는 감정결과를 내려 사실상 유서의 필체와 김씨의 필체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검찰은 스스로 필적감정을 요청하고도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자 증거로 신청하지 않았다. 검찰의 유서대필 주장은 근거를 잃게 됐으며 내년 2월로 예정된 선고공판에서 재판부가 국과수 감정을 받아들이면 강씨는 22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된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유서대필 사건은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던 김씨가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을 비판하며 유서를 남긴 채 자살한 뒤 전민련 동료인 강씨가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그러나 당시 명지대 강경대씨가 경찰의 쇠파이프에 숨진 것을 계기로 대학가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자 곤경에 몰린 정권이 학생운동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들어 생긴 진실화해위원회는 전면조사에 착수해 두 사람의 필적을 다시 감정한 결과 강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강씨는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3년이나 결정을 미뤄오다 지난해 10월에야 개시 결정을 했다. 강씨는 동료를 죽음으로 몰고 간 파렴치범이란 오명을 쓰고 20년 넘게 고통을 겪어왔다. 공사판 막노동까지 전전하는 생활고 속에 간암을 얻어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사법부의 명예를 걸어야 한다. 과거 사법부의 잘못된 결정이 있었더라도 솔직히 인정하고 사법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진 사회 분위기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법과 양심으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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