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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로부터 유럽 예술품을 지킨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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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로부터 유럽 예술품을 지킨 병사들

입력
2013.12.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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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치하 독일은 유럽 전역에서 500만점에 달하는 예술품을 약탈해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약탈 행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전후인 1944년부터 1951년까지 나치가 앗아간 유럽 문화유산을 되찾는 '특별한' 임무를 맡은 소규모 연합군이 있었다. 이들에겐 '모뉴먼츠맨'(The Monuments Men)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지난달 독일 뮌헨의 한 아파트에서 나치 약탈 예술품 1,400여점(1조4,500억원 상당)이 발각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60여년 간 이를 은닉해 온 사람은 나치 정권에서 미술품 거래상을 했던 힐데브란트 구를리트의 아들이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모뉴먼츠맨'의 나치 약탈 문화재 추적 과정을 재조명했다.

나치가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인 1945년 5월 17일. 오스트리아의 소금광산 알타우세에서 군인과 광부들은 곡괭이와 삽으로 돌무더기 벽을 파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 12m 두께의 잔해 더미가 나타나더니 그 뒤로 입구 하나가 보였다.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고, 이들 중 링컨 커스타인 일병이 제일 먼저 입구로 기어 들어갔다. 어둡고 으스스했으며 먼지와 잔해 더미가 가득했다. 그 깊숙한 광산에서 커스타인은 마침내 오랜 기간 찾아 헤맸던, 나치가 숨겨놓은 찬란한 유럽의 문화유산을 발견했다.

이 일이 있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커스타인은 작가 겸 비평가로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발레 앙상블을 처음 선보인 것도 그였다. 커스타인은 진주만 폭격 이후 36세의 나이에 입대를 결정했고, 그에겐 유럽 문화유산을 지키라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다.

1944년 2월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은 자신들의 폭격으로 1,200년 역사를 가진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파괴되자 '기념물, 미술품, 기록물 전담반'(MFAAㆍThe Monuments, Fine Arts, and Archives section)을 창설했다. 같은 해 4월 유럽에 도착한 커스타인의 임무는 만만치 않았다. 그의 부대에 대해 알고 있는 이도 없는데다 차량과 타자기, 무전기, 지도 등 물품도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의 존재 조차 부정되기도 했다. 커스타인은 결국 스스로 필요한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던 중 그는 프랑스에서 제임스 J 로라이머 소위를 만나게 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큐레이터였던 로라이머는 벨기에 브뤼헤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성모자상'과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가 사라지자 홀로 미술품의 행방을 쫓고 있던 터였다. 로라이머는 모뉴먼츠맨의 일원이 될 기회가 주어지자 지체 없이 수락했다. 그 역시 아무런 군사적 권한을 부여 받지 못한 채 프랑스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오로지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명령과 찾아야 할 예술품 목록만을 갖고 프랑스 북쪽 지역을 뒤졌다.

얼마 뒤 그는 임무 수행의 결정적 실마리를 찾게 된다. 모뉴먼츠맨의 중요 정보제공자 중 한 명인 파리출신 여성 로즈 발랑(프랑스 저항군 멤버)을 만난 것이다. 발랑은 나치 약탈 예술품의 주요 창고였던 주드폼 박물관에서 일했다. 여기서 그녀는 나치가 들여오는 작품을 빠짐없이 기록했고 이 작품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추적했다. 그녀의 이런 노력이 모뉴먼츠맨을 나치의 주요 은신처였던 알타우세 광산으로 이끌었다.

이 소금 광산에는 '성모자상'과 '겐트 제단화'를 포함해 그림 6,577점, 스케치와 수채화 230점, 삽화 954점, 조각상 173점, 공예품 상자 1,200여 개가 숨겨져 있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린츠에 세우려고 했던 '총통미술관'(Fuhrermuseum)으로 옮겨지기 전 보관되고 있던 것들이었다.

당초 알타우세 광산의 거대한 창고는 나치 패전과 함께 폭파될 운명이었다. 연합군의 독일 진입 시 국가 기반시설을 파괴하도록 한 히틀러의 '네로 명령'(Nero Decree)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누가 폭발을 막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광산의 총책임자가 거짓 명령을 내려 폭발물을 제거했을 수도 있고, 예술품과 자신의 생계수단이 없어지길 원치 않았던 광부들이 막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알타우세 광산에서 찾은 예술품을 옮기는 작업은 몇 주간 계속됐고, 이 임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모뉴먼츠맨은 거의 매일 지하실이나 기관차, 음식 창고, 수도원 등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보물들을 찾아 냈다. 350명까지 늘어난 이 특수부대는 각종 기록물과 나치 관료들의 집을 조사하는가 하면 박물관 관계자와 목격자들을 탐문하는 등 보물사냥꾼처럼 움직였다.

예술품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모뉴먼츠맨은 1,400점에 달하는 예술품을 은닉해오다 최근 발각돼 역사적 의문점을 불러일으킨 구를리트 가문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1930년대 미술사학자였던 힐데브란트 구를리트는 나치 정권 하에서 약탈 예술품의 매각 처리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뉴먼츠맨은 구를리트에게 프랑스 소유였던 예술품 200여 점의 출처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지만 그는 전쟁 마지막 해에 모두 합법적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뉴먼츠맨은 구를리트가 가지고 있던 예술품 중 150점을 수거했다가 1950년 이를 반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때 되돌려 받은 유물 중 일부가 구를리트 아들의 뮌헨 아파트에서 발견된 예술품에 포함돼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슈피겔은 전했다.

신정훈기자 h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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