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이 '피겨 여왕'이라고 부르는 김연아. 그녀가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골든 스핀 오브 자그레브' 대회에서 우승했다. 총점 204.49라는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은 그녀의 경기 영상을 보면 이 선수가 피겨 여왕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하느님에 빗대 '연아느님'이라는 칭송까지 흘러나오는데 그 또한 무리도 아니어 보인다. 그녀가 연기를 펼치면 신체 전체는 물론 독특한 컬러의 의상조차 완벽한 조화 속으로 빨려 드는 듯해서다. 정말로 그녀의 스케이팅은 여왕의 카리스마처럼 빛나는 힘을 발휘하며, 경기의 시공간부터 관중의 미세한 감정까지 놀랄 수준으로 지배해나간다. 그 점에서 빙상 위의 절대자에 비유해도 과하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번에만 해도 김연아가 더블 악셀을 뛰다 미끄러지고, 콤비네이션 점프를 완성시키지 못한 사실을 안다. 그러나 허무한 과장이래도 한 명의 운동선수를 '결여 없는 신적 존재'로까지 끌어올리고 싶어 한다.
비단 김연아만이 아니다. 최근 2,3년 사이 자극적인 표현을 선호하는 연예오락매체를 넘어 공공의 담론 장까지 표현의 비약, 극적인 언어 사용이 만연하다. 그 현상은 구체적으로,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여신' '○○느님' 같은 호칭을 붙이고, 결과가 대박난 일들에 '신의 한 수' 같은 수사를 남발하는 예로 나타난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신들로 넘쳐난다'든 가, '신들이 할 일이 없어 드라마든 국회든 뻔질나게 강림한다'는 식의 뼈있는 농담이 회자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현실은 구차하다. 말과 이미지의 세계에서 각종 신들이 넘쳐 나는 것과는 정반대로 정치, 사회 전반에서 비상식적인 일들이 난무하고, 일상생활 한가운데서는 각박함 말고는 어떤 자극적인 감정도 느끼기 힘든 형편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드는 생각이, 오늘 우리는 난센스인줄 알면서도 극히 세속적인 대상에 '신'이나 '하느님'같은 용어를 접붙이면서 그나마 숨 쉬는 것은 아닐까 이다. 어차피 갑갑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으니 그 현실에다 가짜 피안을 삽입해 잠시 숨 돌리기. 혹은 궁핍하고 험한 상황을 말의 인플레이션으로 보상받기. 그러느라 초절정의 수사들을 남발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신, 왕 같은 용어가 한 사회 삶의 현장에서 아류로 넘쳐나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현실 너머 궁극적 선을, 현재의 삶을 구원해줄 절대자를 꿈꾸지 못하고 있다는 실증적 징후다. 그런데도 도처에는 힘 센 교회와 절이 있고, 거리의 전도사들은 부단히도 특정 종교단체의 유일신을 믿고 구원받으라고 외친다. 하지만 지금 여기 우리 대부분은 그럴 마음의 여유 공간이 없다. 지면에 붙박인 존재처럼 오로지 현실에 붙들려 살 뿐이다. 궁극의 선과 구원의 절대자를 꿈꿀 이상적 여유 공간, 한마디로 이곳보다 더 나은 저곳을 상상할 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TV를 보며 '힐링'을 외치고, 부조리한 '대박'을 약속하는 광고에 눈뜬 채 코 베이며, 휘황한 용모의 유명인들 사진을 흘깃거리며 시간을 죽인다. 19세기 후반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을 때, 그 말은 자체가 우상이 된 구시대 종교와 신의 자리를 차지한 서구 이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비판의 대상이 된 측이 니체를 비난했던 것은 현실의 패권 때문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한 평범한 이들은 다른 맥락에서 신의 사망 선고에 저항한다. 인간이란 자신이 속한 현세 너머 어딘가 다른 곳,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곳을 꿈꿀 수 있을 때만 지금 이곳의 생도 온전히 유지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삶은 실재의 사막 위에서 말라비틀어진다. 우리가 지금 딱 그런 모습인데, 딱하게도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만든 각종 아류 신들에 매달리고 있다. 위키 백과에 나오듯 김연아를 짧고 객관적으로 정의하는 말은 '대한민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다. 그 말이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해줬으면 한다. 한 사람을 지칭하되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현실감이 투명하게 뒷받침된 설렘 말이다.
강수미 미술평론가ㆍ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