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어제 개혁안을 내놓았다. 대선개입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른 집단의 개혁안치고는 한가하다. 대통령이 죄를 지은 집단에게 처벌 대신 자체 개혁을 주문할 때부터 어이가 없었지만 국회 국정원개혁특위 의원들을 통해 알려진 골자를 보니 역시 예측한대로다.
우선 말썽이 됐던 정치개입에 대해서는 직원들에게 금지서약을 제도화한다고 했는데 이미 국정원법에는 9조에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돼 있다. 법에서 금지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이 왜 굳이 필요한가. 정치성 지시 이의신청제 역시 같은 이유로 필요 없다. 국정원법 11조는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을 금지하고 공무원행동강령 4조에는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도록 명시돼 있다. 퇴직 후 3년 동안 정치개입을 금지하게 한다는 데 이것은 위헌소지가 있다.
국회, 정당, 언론사 등에 배치한 연락관을 철수시키고 상시 출입을 금지하기로 했다는 것은 김대중 정부에서 없앴던 것을 이명박 정부에서 부활시킨 것이니 당연히 사라지는 게 맞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재생이 불가능하게 제도화시켜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사라진 제도가 되살아나고 국정원이 대선개입에까지 나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문제가 되었던 '방어심리전'은 시행규정을 만들어 아예 제도화한다는데 되려 위험스럽다. '북한지령 체제 선동'이야 그렇다 쳐도 '대한민국 정체성과 역사적 정통성 부정' '반헌법적 북한 주장 동조' '이적사이트 정보수집 활동'등의 규정은 최근 대통령을 비판한 양승조 장하나 민주당 의원을 제명하겠다는 여당의 기세로 봐서는 정부비판을 언제든 정체성 부정으로 몰 소지가 있다. 어떤 것이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 부정인지에 대한 상세한 기준이 합의되지 않는다면 없는 것이 낫다. 국정원은 '대공, 대정부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이라는 보안정보'를 다루는 일을 하도록 국정원법에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국정원을 개혁하려면 제도적인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현재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예산 결산 심사를 받는다는 것 말고는 어떤 통제도 받고 있지 않다. 국회 정보위원회의 통제가 얼마나 허술한지는 이번 19대 국회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다. 국정원은 문제의 심리전단이 쓴 150억원 가운데 60억원만 소명을 했지만 결국 국회 결산심사를 통과했다. 90억원이 지역차별을 부추기고 인권을 유린하며 야당 대통령 후보를 비방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쓰였는지 확인도 못해봤다.
국정원 내부개혁안은 부당명령 심사청구센터와 적법성 심사위원회를 두겠다는데 민주주의를 지킬 의지가 없다면 정부에 위원회 몇 개 늘어나는 낭비 밖에 안 된다. 부당명령심사청구센터는 감찰실 내에 설치한다고 했으나 감찰실이 독립적으로 확보된다는 보장이 없다. 적법성 심사위원회는 법률보좌관실 산하에 독립기관으로 신설하고 외부 파견검사 2명이 운영한다고 했는데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을 보직해임한 정부라면 검사 2명의 독립성 확보란 요원한 일이다. 곽노현 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은 공안정보감찰총장이나 공안정보심사위원회를 독립기구로 두는 캐나다나 국회의원들로 정보기관 감시위원회를 구성하는 미국 영국처럼 독립성을 유지하는 외부상설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행이다. 이미 법에 국정원은 정치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고 쓰여있는데 이 법을 어긴 이들이 처벌도 받지 않고 국정원 직원으로 세금을 축내고 있다. 법무부는 엄정하게 수사하려는 검찰을 말리고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그런 법무부와 국정원을 감싸주었다. 조직적으로 인터넷과 트위터로 정치개입을 한 이들을 낱낱이 밝혀 벌을 주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까지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모든 개혁안은 공염불이다. 그들을 처벌하지 않는 한 박근혜 대통령 역시 국정원법과 헌법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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