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전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는 친구인 미국인 여성 2명이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다 매력적인 화가를 만나고, 이들 3명에 화가의 아내까지 얽혀 애정 행각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는 위험한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와 유머가 뛰어났는데, 여기에 바르셀로나의 매혹적인 풍경과 플라멩고의 선율까지 더해져 상영시간 내내 나를 들뜨게 했다. 두 차례 스페인을 다녀왔음에도 다시 그곳으로 날아가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영화의 원제는 'Vicky Cristina Barcelona'.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두 여주인공의 이름이고, 바르셀로나는 배경이 된 도시다. 2008년 제작된 이 영화의 감독은 우디 앨런. 그의 '유럽 도시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이후 2011년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2년 '로마 위드 러브(To Rome With Love)'가 만들어졌다.
우디 앨런이 제작한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로맨틱한 사랑과 일탈, 예술과 유머가 담겼다는 것,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면 배경이 된 도시로 떠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거나 과거 여행을 추억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얼마 전 박원순 서울시장이 사석에서 "우디 앨런 감독을 서울로 초청해 구석구석 둘러보게 하고 싶다"고 했다. 아름다운 서울을 보고 나면 이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고, 그의 '도시 시리즈'에 서울이 등장할 수 있지 않겠냐는 희망섞인 이야기였다. 박 시장은 우디 앨런의 한국계 아내 순이 프레빈에게 '줄을 대' 한국 방문을 성사시키겠다는 꽤 구체적인 구상까지 갖고 있었다.
세계적인 거장에게 관(官) 주도의 영화를 만들도록 하는 게 가능할까 싶지만 우디 앨런은 이미 이런 방식에 익숙하다. 우디 앨런은 당초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을 예정이었지만 바르셀로나 시 당국이 200만 유로를 지원하겠다고 나서자 시나리오를 고쳐버렸다. 바르셀로나 시의 공공자금으로 우디 앨런은 제작비의 10% 가량을 충당할 수 있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와 '로마 위드 러브'도 파리와 로마 시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박 시장이 영화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중국의 장예모 감독이 서울시를 방문했을 때도 "꼭 서울에서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었다.
박 시장이 영화 감독들에게 '서울 세일'을 하는 것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 때문이다. 잘 만든 영화 한편이 도시와 국가의 관광을 부흥시킨 예는 무수히 많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광장 계단이 '로마의 휴일'로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거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뉴질랜드의 관광수입이 10% 이상 늘어났다는 이야기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크고 웅장한 랜드마크 건설에 집착하고 있다. 서울엔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고층건물이 건설 중이며, 한강엔 인공섬이 만들어졌고, 크루즈선이 다닐 수 있도록 하류의 강바닥도 파냈다.
기왕 서울에 온 관광객이야 한번쯤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이런 랜드마크들이 단지그걸 보기위해 만사 제치고 서울로 달려올 정도의 매력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충성도 높은 관광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흔적을 보기 위해 서울을 방문하는 한류스타 팬클럽들이다. 모 아이돌 그룹의 해외 팬들은 기부를 통해 서울에 나무를 심고, 그렇게 조성된 숲을 보기 위해 서울로 날아온다. 생물학적으로야 특별할 게 없는 나무지만 팬의 이름으로 기부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무라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박 시장의 바람처럼 우디 앨런이 서울에 올지, 영화를 진짜 찍게 될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시도가 이어지길 바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그곳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슴 뛰게 하는 스토리, 멋진 영화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한준규 사회부 차장대우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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