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 11일 새벽 2시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 무술경관 1,000여명이 진입했다. 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직원들을 연행하기 위해서였다. 당직자, 의원들이 몸으로 막았지만, 무차별 구타당하면서 20분 만에 상황은 종료됐다. 옥상으로 피했던 김경숙씨가 추락해 숨졌다. 여직원 10여명, 당원 30여명, 취재기자 12명이 부상당했다. 김영삼 총재는 경찰에 의해 상도동 자택으로 끌려갔다. 이 YH사건 이후 야당과 재야는 유신반대 공동투쟁에 나섰다.
■ 이어진 정권의 공작으로 신민당 지구당위원장 3명이 낸 총재단 직무정치가처분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져 YS는 9월 8일 총재직을 잃게 된다. 며칠 후 YS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국민과 유리된 정권,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지를 밝혀라"고 요구했다. 또 "미국 관리들에게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박정희 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해왔지만 내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만 보여왔다"는 비판도 했다.
■ 공화당은 난리가 났다. 용공 이적행위, 반국가적 언동, 사대주의라는 비난을 쏟아내고 의원직 제명을 추진했다. D데이는 신문이 휴간하는 추석 전날인 10월 4일. 공화당 의원들과 '체육관 선거'로 뽑힌 유정회 의원들은 신민당 의원들이 점거한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146호실로 모였다. 제명안은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반발한 신민당 의원 60명 전원과 통일당 의원 3명이 사퇴서를 냈다. 이 와중에서도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자는 공화당 강경파들이 있었다.
■ 앞이 안 보이는 시국이었다. 민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YS의 지지기반인 부산 마산이 들썩거렸다. 10월 16일 부산대생 5,000여명이 유신철폐 가두시위에 나섰다. 18일 부산에 계엄이 선포됐다. 그러자 부산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불길은 마산으로 번졌다. 8일 후 박 대통령이 저격 당한 10ㆍ26 사태가 일어났다. YS 의원직 제명의 전말이다. 시대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34년 만에 재연된 의원직 제명 추진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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