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부터 명토를 박아두자. 달실마을이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유곡(酉谷)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하다(金鷄抱卵形)'는 마을 모습을 한자로 축약한 것이다. 사서삼경의 삐죽한 한문 구절이 지금도 골목에 굴러다니는 뼈대 굵은 양반 마을이라지만, 주민들은 500여 년 전 마을이 형성될 때부터 여태껏 동네를 유곡 대신 달실로 부른다. 여기서 '달'은 닭. 경상도 남쪽 바닷가 사람들이 쌍시옷 소리를 못 내듯, 고개 몇 개 넘으면 곧 강원도 땅인 경상도 북쪽 산자락 사람들은 리을기역 발음이 힘들어 그렇단다. 그런데 외지인들이 한자와 한글을 맞춰보더니 '닭실'로 표기했다. 백과사전에도 닭실마을로 나와 있다. 하지만 달실이 어감도 예쁘고 유래도 깊다. 주민들은 자기네 고운 이름 달실을 되돌려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붙잡고 당부한다.
달실의 이야기는 충재 권벌(1478~1548)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왕조 궁궐세트에서 찍은 드라마를 챙겨보는 편이라면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문정왕후 가문에 맞서다 파직돼 유배지에서 병사하는 꼬장꼬장한 늙은 재상 캐릭터가 충재다. 드라마에선 비중이 크지 않아 늘 노년의 단역 배우가 맡는 역할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의 존재감이 작지 않았다. 충재가 터를 잡고 뿌리를 내려 여태껏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달실마을이다. 겉보기엔 평화로운 농촌인데 얽힌 이야기가 만만찮다. 봉화읍에서 오리 거리, 고개 하나 넘어가면 닿는 이 마을에 와보면 조선의 드라마틱한 역사를 어제인 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요샌 경북 지역이 역사적으로 야당 성향이었다고 말하면 다들 피식-하고 웃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경북은 야당 지역으로 분류됐어요. 영남은 선비들의 비판정신이 시퍼랬던 곳이거든요. 이곳 달실은 충재 할배 시절부터 그 중심 가운데 하나였고요."
충재의 직계 후손인 권용철 달실문화유적보전회 학예실장은 먼저 동네의 박물관으로 안내했다. 시골 개인박물관에 뭐 볼 게 있겠나 싶겠지만 보물 5점 등 국가지정 문화재만 482점 소장돼 있다. 충재가 과거시험에 냈던 답안지와 중종의 직인이 찍힌 한성판윤(서울시장) 임명장 등 흥미로운 유물이 많은데, 눈길을 끄는 것은 2,700여명이 연대 서명한 만인소(萬人疏)다. 만인소란 재야의 유생들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모아 임금에게 직간하던, 정치적으로 소외된 지식인들이 취할 수 있는 당시로선 가장 강력한 행동이었다.
이 박물관에 보관된 만인소는 철종 때의 것으로 안동서원의 현판이 파괴된 것을 성토하는 내용이다. 당시 여권이었던 노론은 야권인 남인을 욕보이기 위해 영남의 서원에 심심찮게 해코지를 했단다. 그런데 그만 영조의 친필인 안동서원의 현판마저 부수고 말았다. 그래서 벌떼처럼 일어섰던 분노가 두툼한 두루마리에 또렷하게 기록돼 있다. 겉으론 현판을 부순 일을 탓하고 있지만, 속은 국정을 농단하는 노론, 그리고 그들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임금을 준열히 꾸짖고 있다. 이 마을에 들러도 마을 끝에 위치한 박물관은 보지 않고 가는 경우가 많은데 짬을 내 들러볼 만하다. 영남 선비의 독할 만큼 꼬장꼬장한 의기, '야당지 경북'의 낯설지만 오래된 진면목을 살펴볼 수 있는 흔적이 거기 가득 담겨 있다.
달실마을의 가장 유명한 문화재는 청암정이다. 가장 아름답기도 해서 봉화군을 안내하는 팸플릿에 심심찮게 표지로 등장하는 유물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여기서 찍었는데,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마다 유원지에 온 듯 떠들썩 놀고 가는 곳인데, 실은 이곳은 세상의 번뇌를 잊고 내면으로 침잠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중종의 총기가 흐려져 조정이 시끄럽던 16세기 초, 충재는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다 결국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직된다. 그때 나이가 마흔 하나. 이후 15년 동안 복권되지 못한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펴보기는 글렀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내면의 공부를 위한 정자를 짓는데 그는 심혈을 기울였다. 원래 루(樓) 형태의 정자는 사방이 환하게 틔어 있으나 청암정은 나무를 심어 외부를 가렸다.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싶었던 충재의 뜻이 반영된 것일 게다. 충재의 회한은 이제 아담한 신선세계로 남아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 고즈넉한 툇마루를 내어주고 있다.
마을엔 고택이 많지만 한옥 숙박 공간으로 이용되는 추원재를 제외하고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미리 신청하면 둘러볼 수도 있지만 무턱대고 찾아가 한옥집 살림을 좀 구경하자고 하면 퇴짜를 맞는다. 카페와 주점, 민박집 등 편의시설이 많은 다른 한옥마을을 가봤다면 거 되게 깐깐하게 군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달실이 옛 분위기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다. 권 실장은 "이곳은 아직 어른들의 의견이 중한 곳이라, 그분들이 살아계신 한 삿된 장사를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걸어서 10여분 가면 있는 석천계곡이, 애써 여기沮?찾아간 수고를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수려한 경관 속에서 공부하던 유생을 위한 기숙형 학교였던 석천정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공간 속에 잠시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공부가 된다.
온통 위아래도, 옳고 그른 것도 없는 세상에 아이들에게 뭔가 지켜야 할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면, 손잡고 달실마을로 가보면 좋을 것이다. 문의 달실문화유적보존회 (054)674-0963
봉화=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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