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예감이 들어맞은 건 무척 오랜만이다. 기분 좋은 일이다.
'시운행 중인 기차를 미리 타봤다. 시속 30㎞. 과연 느려터졌다. …… 근데 이 기차, 미어터질 거란 예감이 들었다. 속도에 웃돈을 얹어주고라도 다시 바꾸고픈 낭만이, 느긋한 기관차에 달랑 세 량 달린 열차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운행을 시작한 지 8개월,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는 주말엔 좌석 잡기가 힘든 인기 관광상품이 됐다. 경북 봉화군 첩첩산중과 강원 태백시 심산유곡 사이를 느긋하게 굴러가는 세 칸짜리 디젤열차. 에어컨도 와이파이도 없는 딱딱한 좌석에 앉아 이 굼뜬 움직임에 몸을 실어보겠다고, 수백 ㎞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시골역이 북적댄다. 그건 이런 뜻일 게다. 조금 느리게, 그리고 조금은 '언플러그드(unplugged)'하게 살고 싶은 바람이 사실은 간절하다고. 아마 복잡한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뉴스앱으로 이 기사를 읽고 있을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협곡열차가 업그레이드됐다. 내용은 두 가지. 밤열차 운행과 기차역 사이를 잇는 트레킹 코스 개통이다. 하드웨어는 손대지 않고 소프트웨어만 다시 업그레이드 한 셈이다. 관광자원 '개발'이라면 일단 시멘트부터 몇 트럭 들이붓고 나서 생각을 시작하는 공화국에서, 그것도 공기업-민영화 저지를 위한 총파업에 들어갔지만-이 이런 방식의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특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차가 닿는 가장 깊숙한 곳, 백두대간의 척수에서 그 업그레이드 버전을 확인할 수 있다.
6일 운행을 시작한 별밤열차는 내년 3월까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6시 분천역을 출발해 1시간 7분 뒤 철암역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 열차가 오후 7시 45분 철암역을 출발, 다시 분천역으로 돌아온다. 운임(편도 8,400원)과 코스, 양원역과 승부역에서 10분씩 정차하는 것도 낮에 달리는 협곡열차와 같다. 뭘 그것 갖고 업그레이드씩이나 운운할까,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타보면 안다. 협곡열차가 달리는 골짝굽이가 얼마나 캄캄한 세상인지. 도시에선 멸종 위기에 처한 칠흑의 밤이 이곳에선 1급수에 사는 산천어처럼 살아 있다. 하늘과 땅이 분간 없는 검정이어서, 중력을 감지하게 해주는 것은 엉덩이 밑에서 덜컹거리는 레일의 감촉뿐이다.
별밤열차는 조명을 한껏 낮추고 운행한다. 환하게 불을 켜고 달리는 야간열차의 외모에 익숙한 눈에 퍽 낯설게 보였다. 열차에서 삐져나오는 불빛은 야전부대의 전투교범에 나오는 전술적 차량행군의 조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 찍느라 꽤 애를 먹었다. 그건 밖에서 기웃대는 사람의 사정이고, 열차 안에 타고 가는 사람은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그래야만 이곳에 사는 귀한 손님도 열차에 올라탈 수 있다. 그 손님은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이다.
오후 6시. 산중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스위스 어느 산골역이랑 자매결연을 맺어 알프스풍의 체크무늬 커튼이 예쁜 분천역을 벗어나자, 별밤열차는 곧 초콜릿을 끓여서 쏟아놓은 것 같은 어둠으로 빨려 들었다. 별과 별 사이의 공간인 듯한 깜깜한 어둠 속으로의 기차여행. 나이에 니은자 들어갔으면 공감할 만한 판타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나는 네 소년 시절의 마음 속에 있는 환영일 뿐이야.'
'은하철도 999'의 메텔 누나는 지금 어느 별에 살고 있을까…. 그런 감상에 젖어들 시간은, 그러나 아쉽게도 길지 않았다. 별밤열차는 곧 이벤트 공간으로 변신했다. 어쿠스틱 라이브 공연과 마술쇼, 그리고 레이저 조명. 어린이 승객들은 자지러지게 좋아했다. 별밤열차는 어린 자녀를 둔 가족 여행객에게 최적화돼 있다. 어른 승객의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 미야자와 겐지는 어린 시절 밤 기차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오리지널의 칠흑 같은 밤. 아이에게 기차를 타고 그걸 경험해 보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협곡열차를 타고 승부역에 내렸다. 그리고 다시 기차를 타고 온 방향을 향해 걸었다. 낙동강 상류를 따라 걷는 트레킹 코스는 지난달 말 개통됐다. 길은 이 골짜기에 주민이 적잖이 살던 시절, 원래 장에 가고 학교 가고 마실 다니던 길이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고 마을마저 사라지고 난 뒤 길은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는데, 거기 이정표를 세우고 데크를 깔고 계단을 만들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예쁜 길로 단장했다. 지난 봄 협곡열차와 중부내륙 순환열차(O-Train) 개통 뒤 폭발적으로 늘어난 관광객에 놀란 봉화군이 흔쾌히 돈을 댔단다. '완료'됐다는 공사는 아직 진행 중이라 군데군데 길 놓는 작업을 하는 인부와 멋쩍게 마주칠 수도 있다. 그들도 왠지 반갑다.
'낙동강 비경길'이라는 조금은 군둥내 나는 이름을 붙인 이 길은 승부역에서 양원역까지 5.6㎞ 구간甄? 넉넉히 느긋한 걸음으로 두 시간 거리. 양원역에서 비동 임시승강장까지 이어진 2.2㎞의 '체르마트길'까지 이어 걸으면 총 3시간이다. 승부역에서 배바위재 넘어 비동승강장에 이르는 6.5㎞의 길도 있다. 비동승강장에서 분천역까지 4㎞도 낙동강 상류의 맑은 물빛을 곁에 끼고 가는 호젓한 산책로. 예전 같았으면 접근성이 떨어져서 찾아가 볼라치면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기차로 쉽게 비경길 탐방에 나설 수 있다. 하루에 총 여덟 차례 있는 협곡열차와 순환열차, 무궁화호를 타고 원점으로 회귀할 필요가 없는 알뜰한 코스를 다양하게 짤 수 있다.
승부역에서 걷기 시작한 지 약 한 시간, 숲이 깊어지는 비탈길을 걷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언제 버려졌는지 바퀴는 사라지고 철골만 남은 녹슨 리어카의 손잡이가 오리나무 속에 박혀 있었다. 철과 나무의 연리지(連理枝). 이곳이 사람 살던 마을이었다는 기억을 나무는 그렇게 부여잡고 있었다. 마을의 이름은 각금마을이다. 낙동강 자갈길을 걸어 목적지인 양원역에 도착했다. 지난 봄까지 휑하던 역사 주변에 간단한 먹거리와 산나물을 파는 가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걷느라 출출해진 여행자에게 그건 반가운 시설이지만, 이곳의 고요함을 기억하는 이에겐 어쩔 수 없는 아쉬운 변화다. 곡선이 유난히 곱던 철로는 올라가는 사람이 많아졌는지 높다란 펜스가 설치돼 있었다.
그나저나 장사는 할만할까. 여름 한철은 꽤 괜찮았다고 이복남 할머니(79)는 말했다. 열아홉에 시집와서 올해 꼭 60년째 이 오지에 살고 있는 그에게, 갑자기 불어나 북적대는 여행자들이 혹 밉지는 않은지 에둘러 물어봤다. 할머니의 대답이 오묘했다.
"저 태백서 탄가루 내려올 직에, 여 물(낙동강 상류)이 참 더러웠니라. 그래도 밉다 칼 수 있나? 살다보믄 산도 물도 다 지줌대로 맑아지니라."
[여행수첩]●별밤열차(제4865열차)는 내년 3월까지 매주 금ㆍ토요일 오후 6시 분천역을 출발해 오후 7시7분 철암역에 도착한다. 철암역에서는 오후 7시45분 출발해 8시50분 분천역 도착.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분천역으로 가야 한다. ●열차를 이용할 경우엔 중앙선 열차를 타고 영주까지 간 뒤, 영주에서 오후 3시 54분에 출발하는 중부내륙순환열차(제4852열차)로 갈아타면 별밤열차 출발 1시간 전 분천역에 도착할 수 있다. 예매 및 발권은 코레일관광개발 (02)2084-7786 ●분천역과 철암역 인근엔 숙박시설이 부족하다. 분천역보다 철암역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가 편하다. 태백버스터미널 (033)552-3110 낙동강 비경길은 정비 작업이 마무리 단계다. 각금마을-양원역 코스는 산속의 좁은 오솔길이니 이정표를 잘 살펴야 한다. 봉화군 관광안내 (054)679-6114
봉화=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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