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뚜껑에 못 박히기 전엔 철들기 힘듦.'한 친구가 자신의 학교 생활기록부 행동발달사항 난에 고3 담임교사가 남긴 촌평이라며 "내가 그리 문제아였냐"고 반문해 좌중을 웃겨준 일이 있다. 당시의 교사보다 나이를 더 먹은 우리의 그날 웃음에는, 그 엄숙한 기록물의 험악한 표현조차 웃음이 될 수 있던 '따사로이 가난하던' 시절의 향수와, 그렇게라도 말썽꾼 제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교사의 치기까지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었다. 아마 교사는 훗날 제자들이 그 글을 보고 지을 표정을 상상하며, 꼭 닮은 미소로 그 글을 썼을 것이다. 인간은 영악해서, 언제든 드러날 악의를 그렇게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어쨌건 내 친구는, 요즘 세태로는 믿기지 않을 일이지만, 그 학생부로 사범대에 진학해 20년 넘게 교사로 일하고 있다.
위선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건대, 나는 철듦을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이해하고 나를 절제하고 당장의 자기 희생이 길게는 나와 우리를 더 나은 자리로 가게 하는 힘이란 걸 이해하는 안목 같은 것. 나만 알고 나만 옳은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렇게 한결같이 살 수 있는 인간은 드물다. 살다 보면, 또 살자면, 나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 때가 있다. 윤리적 동기에서건, 체면이나 처세의 방편으로건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합리화하며 철이 든다.
만일 관 뚜껑에 못 박힐 때까지 철 들지 않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제왕적 삶의 조건을 타고나 독선에 절여졌거나, 가망 없는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의 노예일 것이다. 그들은 늘 (겉으론) 당당해서 부끄러움을 모른다. 설령 부끄러워도 그 부끄러움을 공격적인 형태로 드러냄으로써 그 폭력의 독기로 독선의 아성을 더 두텁게 한다. 그들도 드물게 웃지만 대개는 오만과 우월감의 과시적 표현일 뿐이어서, 민망한 듯 배시시 스며 나오는 숫저운 웃음의 아름다움을 그들은 모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민주주의라는 것도 사회의 철듦 같은 것일지 모른다. 힘이 있든 없든 다수든 소수든, 나의 옳음을 강요하지 않고 내 집단의 이해만을 앞세우지 않는 사회. 개인을 앞세우는 자유와 공공을 우선하는 민주주의를 버무려 자유민주주의라는 형용모순의 간판을 당당히 내걸 수 있는 것도, 개념적 엄밀성 너머에서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룰이나 가치 같은 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고운 놈은 뭔 짓을 해도 눈감아 주고 싶고 미운 놈은 부풀려 본때를 보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고운 놈이 내게 고마운 놈이기도 하다면 두말 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그게 룰이고 공적 가치다. 이를테면 근대 시민사회의 근간인 사회계약, 법치, 민주주의가 그런 것들이다. 그게 또 시스템이다. '관계가 좋으면 많은 것이 허용된다'는 몰캉한 인간적 잣대를 차갑게 얼려두자는 합의. 유연함은 인간적인 아름다움이지만 시스템은 경직된 완고함으로 빛을 낸다. 그러므로 덜 차가운 시스템이 있을 뿐, 따스한 시스템이란 없다. 권력도 그렇다. 좋은 권력과 따듯한 권력을 함께 얻기란, 서글프지만 힘들다. 마키아벨리가 알던 '신의 없는' 대중, 민주주의를 경계하며 니체가 우려했던 '무리 짐승'으로서의 대중은 오늘날의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꾸준히 성장해왔고, 또 그러리라 믿는다. 국가정보원 같은 국가기관의 대선 오염 의혹이 온갖 정황과 관련자 진술로 스멀스멀 드러나도, 대통령이 끝내 특검을 거부해도,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큰 골격은 훼손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시대착오적인 일들, 아니 이 사회를 40년쯤 전 과거로 되돌리자는 게 권력의 기획인가 의심케 하는 일들도 있다. 하지만 유신의 총칼로도 막지 못한 것을 물대포 따위로 막을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권력이 민주주의를 억압하면 당장의 성장은 더뎌질 테고, '물대포의 희생'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상처 없이 시대를 거스른 권력 역시 없었다는 것도 우리는 경험으로 역사로 안다. 철은 그렇게도 든다.
최윤필 기획취재부장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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