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당시에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중략) 광복 후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다." → "이승만은 광복 직후 여운형이 추진한 조선 인민 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될 정도로 좌우를 떠나 당시 한국인들에게 민족 지도자로 받아들여졌다."
지난 10월 교육부의 수정권고를 받고 고쳐진 교학사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이다. '이승만의 활동에 대해서는 과도한 해석으로 교과서 서술에 적합한 용어 및 문장 구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따라 고친 것이지만, 전후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10일 교육부의 최종 승인으로 교학사 교과서의 전체 내용이 처음 공개되자 학계가 더욱 들썩이고 있다. 수정권고ㆍ명령을 받고 두 차례나 고친 교과서 곳곳에 여전히 왜곡과 오류가 심하다는 지적이다.
수정명령을 받고 고친 내용부터 논란을 낳고 있다. 김성수와 관련한 기술에 대해 '친일 행적 등에 대한 비판이 있으니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재서술하라'고 수정명령을 내렸지만 교학사 교과서는 경성방직ㆍ동아일보 설립 등 경영자로서 김성수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친일 행적에 대해선 학병 지원 독려, 전쟁 협력 단체 참여, 일제 징병 찬성 기고 소개에 그쳤다. 원래 서술에 없던 해방 후 조선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참여 거부, 한국민주당 지도 사실 등을 덧붙이며 "이승만,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끄는 정치인이 됐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한국사 교과서에 김성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넣은 것 자체가 문제인데 처음엔 없던 해방 이후 행적까지 추가한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며 "아예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 집의 기둥만 고쳤는데 교육부가 승인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역시 왜곡이란 비판을 받은 제주 4ㆍ3사건 서술도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의 많은 희생이 있었고, 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가 살해당하였다"고 고치는 데 그쳤다. 당시 희생자 수는 군ㆍ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78.1%, 무장대에 의한 희생이 12.6%로 밝혀졌는데도 비슷한 것처럼 오도할 우려가 있다.
일제강점기 미주독립운동단체였던 국민회와 대한인국민회를 두고는 한 교과서 안에서 제각각으로 기술했는데도 걸러지지 못했다. 1909년 장인환ㆍ전명운의 의거를 계기로 만들어져 신한민보를 발간하기 시작한 단체는 국민회이고 그 이듬해 미주동포단체와 통합, 결성된 것이 대한인국민회다. 그러나 수정권고 이후 교학사 교과서는 활동 내용은 국민회로, 결성 시기는 대한인국민회로 섞어 기술했다(251쪽). 여기다 교학사가 자체수정을 하면서 다른 페이지(274쪽)에는 1909년에 대한인국민회가 만들어졌다며 결성 시기를 틀리게 적었다. 이준식 연세대 연구교수는 "두 단체를 헷갈려 서술이 오류로 뒤범벅됐다"며 "역사 교과서에서 있어선 안 되는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역사학계에서 지적이 빗발쳤는데도 수정권고나 명령에서 제외돼 그대로 교과서로 인쇄될 대목도 여러군데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5ㆍ16군사쿠데타의 책임을 장면 정부에 전가한 서술(324쪽) ▦"5ㆍ16 군사정변은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였다. 하지만 반공과 함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시위를 하였다"는 5ㆍ16쿠데타 미화 서술(324쪽) ▦박정희ㆍ육영수의 사망을 '부모나 임금을 죽임'이라는 뜻의 '시해'로 표현한 서술(325쪽)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꼽히는 1974년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을 단순히 '무리한 법 집행'으로 설명한 서술(326쪽) 등이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역사교육)는 "교육부가 수정권고ㆍ명령 과정을 통해 결국은 한 교과서의 편을 들어준 것"이라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같은 논란이 일어나는 걸 막으려면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인사로 구성된 독립기구를 만들어 검ㆍ인정 업무를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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