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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2월 11일] '불통'만 탓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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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2월 11일] '불통'만 탓하는 사회

입력
2013.12.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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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주요 화두 중 하나는 단연 소통이었다. 그렇다면 국가를 지탱하는 정치, 경제, 그리고 안보라는 세 가지 축에서 소통은 어떠했는가. 안보는 필연적으로 소통에 가장 인색한 분야다. 나머지 정치와 경제는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국가에 유익한 정책별 담론이 활발히 촉진돼야 소통이 잘 된다고 평가한다. 정치 분야의 소통은 정치인과 정책 책임자, 경제 분야의 소통은 기업 최고 경영자, 성공한 벤처 기업가들의 몫이다. 그런데 올 한해 정치와 경제에서는 불통, 안보에 있어서는 소통을 넘어선 폭로 일색이었다. 거꾸로 가도 한 참을 거꾸로 갔다.

정치적 소통은 실종됐고, 정책 추진 과정에서는 뒷북 소통이 여전했다. 행복주택시범 사업 예정 지역 중 한 곳의 주민들과 118회 의견수렴을 했다는 국토교통부, 한 번도 제대로 된 소통이 없었다는 해당 주민의 반응은 양 끝단에 놓여있는 대한민국 소통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경제 분야에서는 여전히 은둔의 고수란 평가를 받는 경영자들이 대부분이다. 누구도 비전을 제시하거나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최근 네이버의 창업자 이해진 의장이 12년 만에 나름의 해외 사업성과를 갖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문불출했던 시간을 되돌려 보면 국내 대기업 총수들의 전유물이었던 신비주의와 은둔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경제계 리더의 침묵, 거친 말로 편 가르기를 일삼는 정치인의 갈등 촉발, 형식에 더 방점을 찍는 정책 현장의 소통은 일상이 된지 오래다. 이렇듯 온전한 소통이 실종된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대통령, 정치인, 경영자들만 비판한다고 해결될 문제일까? 이제 그 원인을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서 찾아볼 때다. 매번 소통을 요구하지만 말고 국민 스스로가 변화해야 한다는 절박함의 발로다. 소통은 말하는 자, 듣는 자 그리고 그들 간 관계를 규정하는 맥락의 세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룬 상태다.

누군가에게 소통을 요구한다면 자신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소통의 시작은 말이 아닌 경청으로부터인 것도 이 때문이다. 듣기 싫은 것도 곱씹으며 들어보고 성찰적으로 사고한 후 응답을 줘야 다음 대화를 이어 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 내부는 공동 합의의 영역을 집단 이익의 영역이 대체하고 있다. 듣고 조정하고 타협할 준비 보다는 확고한 결론으로 무장하고 방어 태세를 갖춘 이해 집단이 대부분이다. 스마트폰의 혁신과 보급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논의의 확산을 가져오는 듯 했지만 오히려 의도를 갖는 소수의 일방적 자기 주장 도구로 더 많이 활용되고 있다. 그로 인해 공적 논의가 차단된 지 오래다. 조금만 다른 의견을 드러내면 비판자들이 가세해 지켜보는 국민을 위축시킨다. 싸움을 각오하면 소통을 시작해도 그렇지 않다면 침묵해야 하는 극단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그 사이 우리 사회에서 토론과 합의라는 말은 이상적인 어휘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리더이니 무조건 소통의 장으로 나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마치 그들에게 불완전한 여론의 공개 재판을 받으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다 보니 미완의 결과를 갖고 과정을 토론하는 것에 인색한 것이 대한민국 리더의 평균적인 모습이 되었다. 정면 돌파식의 확고한 원칙과 의지를 천명하거나 아예 침묵하는 두 가지 소통만 남게 된 것이다. 성과를 갖고 비판할 틈을 주지 않는 완벽한 소통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갖고 있다.

현실은 이런데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 독일 여성 총리의 소통 스타일을 따르라 조언하고, 성공한 벤처 기업인들에게는 스티브 잡스의 환생을 기대하며, 대기업 총수에게는 잭 웰치 같이 왕성한 사회적 소통을 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봐야 한다. 특정한 개인이 아닌 그들이 속한 사회의 소통 여건을 냉정하게 비교 평가해야 한다. 결론을 정해 놓고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과 조정을 통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국민 개개인의 평균적 의식 향상이 소통 활성화의 선행 변수다. 그러고 나서 불통을 탓해도 늦지 않다. 이미 우리는 너무 먼 길을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혁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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