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입원은 가급적 줄이고 재발방지 클리닉 운영… 사회적응 돕는데 역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입원은 가급적 줄이고 재발방지 클리닉 운영… 사회적응 돕는데 역점

입력
2013.12.10 11:43
0 0

"치료 더불어 사회복귀 지원이 만성화 막는 가장 효과적 방법"선진국형으로 탈바꿈 가속 검정고시·취업대비반 등 환자 맞춤형 프로그램 개설의사·사회복지사·봉사자 등 팀 단위 치료로 입원도 단축치료 거부하는 환자들 위해 찾아가는 서비스 적극 모색도

인구의 27.6%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질환을 겪지만 관련 보건정책은 허점투성이라는 본보의 지적(2012년 9월24~27일자 '늘어나는 정신질환, 구멍 뚫린 보건정책' 기획 시리즈 참조) 이후 보건당국은 정신질환 만성화를 막고 치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정신보건법을 확 바꾸겠다는 계획을 5월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아직 국회에 제출도 안 됐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하반기 통과가 목표"라는데, 국회가 그렇게 일해줄지는 모를 일이다. 정책 변화가 지지부진한 사이 정신병원들이 스스로 나서기 시작했다. 풀뿌리 변화로 숲이 바뀌길 바라면서 말이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정모씨가 느닷없이 정신질환자가 된 건 7월 말이었다. 필리핀 어학 연수를 다녀온 뒤 복학을 준비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극심한 우울증이 왔고, 발작 땐 막 소리를 지르고 자신도 모르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창창한 20대 청춘에 정씨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조현병(정신분열병)이었다.

대부분의 정신질환 증상은 이처럼 소리 없이 찾아온다. 아무런 대책 없이 하루 아침에 정신질환자가 돼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이 병을 인정하지 못해 치료를 거부한 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 더 나빠지고 만다.

하지만 정씨는 달랐다. 치료가 시작된 지 3, 4개월 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됐다. 오히려 "발병 전보다 더 희망과 의욕이 생겼다"고 정씨는 말한다.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덕분이다. 어떤 치료를 받느냐에 따라 정신질환자의 삶은 180도 바뀔 수 있다.

"죽고 싶던 내게 꿈이 생겼어요"

"졸업이 다가오니 조급했어요. 공부도 취업 준비도 제대로 하는 건지, 내가 원하는 길이 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죠. 취업에 대한 압박감이 너무 심해서 병이 생긴 것 같아요. 끼니마다 약을 열 알씩 먹어야 했어요. 정신병 환자라는 자괴감에 견딜 수가 없었죠. 사람들이 다 나만 보는 듯했고, 누가 계속 쫓아오는 것 같았어요."

자꾸 약을 거르다 보니 증상이 더 빈발했고 세 번이나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보다 못한 의료진이 주사 치료도 있다며 의사를 물어왔다. 먹는 약보다 비싸지만, 한 번 맞으면 약효가 한 달간 지속되기 때문에 심적 부담이 덜 할 것 같아 정씨는 치료법을 바꾸기로 했다.

다행히 우울이나 망상 같은 증상이 사라졌고, 마음이 안정돼갔다. 변화를 포착한 의료진은 정씨를 일반 입원 병동이 아닌 개방 병동으로 옮겼다. 먹고 자는 일상 생활은 병원에서 하되 외부를 드나들 수 있는 병동이다. 이곳에는 다른 병원과 달리 환자의 일상 복귀를 돕기 위해 각종 사회 적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재발방지클리닉이 있다. 정기적인 상담은 물론 검정고시 준비반, 취업 대비반, 직장 재활반 등을 열어 환자들이 자연스럽게 다시 지역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 클리닉에서 정씨는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솟았고, 제과제빵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자격증 따고 취업해서 실무를 배운 다음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몹쓸 병도 이겨냈는데 뭔들 못하랴 싶다"는 것이다. 주말에는 집에도 들르고 친구들도 만난다. 아직 완치되진 않은 정씨가 여느 청년들과 비슷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된 건 스스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원해준 병원의 도움이 컸다.

정씨를 치료하는 곳은 경기 부천시 루카스병원이다. 정씨 한 사람을 보살피는 데 투입한 인력이 의사와 간호사뿐 아니라 자원봉사자, 사회복지사, 지역보건센터 담당자 등 총 6명이다. 개방 병동을 운영하는 병원은 사실 여러 곳 있다. 하지만 대부분 외부 출입만 가능할 뿐, 병원 밖 생활은 환자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나아졌다고는 해도 환자들이 홀로 차가운 시선을 견디며 새 삶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 적응 실패는 재발의 주요 원인이다.

루카스병원이 올 여름부터 환자 맞춤 재발방지클리닉을 운영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김승겸 루카스병원장은 "꾸준히 치료받으면서 서서히 사회에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게 가장 효과적인 재발 방지 방법"이라고 말했다. 재발 횟수가 늘수록 치료 효과는 떨어지고, 환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병이 만성화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현재 이 병원 조현병 환자 200여 명 중 약 20%가 이 클리닉을 이용하며 사회 복귀를 적극적으로 준비 중이다.

발병 초기부터 재발을 막기 위한 이 같은 노력이 선진국에선 이미 10여 년 시작됐다. 하지만 국내 많은 정신병원들은 여전히 이미 만성이 된 정신질환자를 관리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고 전문의들의 지적한다. 정신질환은 입원이나 외래뿐 아니라 개방 병동, 사회적응 프로그램 같은 중간 단계 시스템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이런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OECD의 올해 각국 보건의료 통계에서 우리나라의 조현병 재입원율은 19.5%로 OECD 평균(12.9%)보다 높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초발 환자 10명 중 약 4명이 재발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입원 기간 252일에서 67일로

환자가 사회에 복귀하지 못하고 재발을 반복하면 입원 장기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보건복지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2010년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정신의료기관 환자들의 연 평균 재원 일수는 166일이다. 호주(52.8일)나 독일(25.3일), 미국(8일)보다 너무 길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시 동구 대동병원의 변화는 의료계에 큰 의미를 던진다. 이 병원 정신질환자의 연 평균 입원 일수는 67일로 국내 평균의 절반도 안 된다. 조현병 등 중증 환자는 101일이다. "'단기 입원'을 기본 정책으로 삼고 의사와 간호사, 약사, 영양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등이 팀을 이뤄 증상을 모니터링하며 입ㆍ퇴원 등 치료 관련 모든 사항을 환자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팀 단위 의료체계가 입원 기간 단축에 주된 역할을 했다"고 이 병원은 분석한다. 환자에게 치료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동기를 부여한 점이 치료 효율을 높였다는 얘기다.

공공 병원도 변화의 움직임이 보인다. 충남 공주시 국립공주병원은 외래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가정 방문 진료를 준비 중이다. 치료를 거부하며 병원에 오지 않는 환자의 집으로 의료진이 직접 찾아가는 적극적인 맞춤 서비스다. 지역에서 싹튼 작은 변화가 정신질환 재발을 줄이는 밑거름이 되길 이들 병원은 기대하고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