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주장에 대해 검찰은 정말 아무런 입장이 없습니까?" "…."
지난 10월 수원지법 형사3부(부장 장순옥) 심리로 열린 경찰관 류모(47)씨의 직권남용체포 등 사건 항소심 결심 공판.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해야 할 검찰이 공소 유지에 전혀 뜻이 없는 기막힌 상황이 이어졌다. 지난 6월 첫 공판 이후 줄곧 이런 태도를 보여온 검찰은 법원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기소한 데 대한 불만을 드러내듯 결국 무죄를 구형했다.
재정신청 사건에서는 흔한 광경이다. 류씨는 경기경찰청 전투경찰대장이던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당시 연행되는 노조원들의 변호인 접견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권영국 변호사를 불법 체포한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은 당초 류씨를 무혐의 처분했으나, 권 변호사가 서울고법에 낸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지자 기소한 뒤 1심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검찰은 재판부의 공소 유지 독촉에 침묵으로 일관하는가 하면, 증인심문 과정에서 피고인 측을 두둔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권 변호사가 형사소송법에 보장된 피해자의 변론권을 활용해 유죄 입증에 나섰다. 결국 재판부는 지난달 28일 피해자 측이 낸 자료 등을 토대로 류씨에 대해 원심과 같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검찰의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기형적인 재정신청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마지못해 류씨를 기소한 검찰이 재판에서 수사의 미비함을 인정하지 못해 이 같은 촌극이 벌어졌다"며 "권 변호사야 법률가니 그나마 유죄를 이끌어 낼 수 있었지만 일반인 피해자였다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넋 놓고 피고인의 무죄 선고를 지켜봐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2007년 개정된 형사소송법 262조는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해 법원이 재판 진행을 명할 경우 검사만이 사건의 공소 유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전에는 재정신청 사건의 경우 법원이 지정한 변호사에 공소 유지를 맡았는데, 검찰이 형소법 개정 과정에서 재정신청 적용 범죄의 범위 확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검사 지정제'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검사 지정제가 도입되자 학계와 시민단체 등은 "재정신청의 취지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개정법이 시행된 2008년부터 2009년 6월까지 재정신청 사건에서 유죄가 선고된 42건 가운데 30.9%에 달하는 13건에 대해 검찰이 무죄를 구형하거나 구형 자체를 포기했다. 당시 검찰이 무죄를 구형한 사건에 유죄를 선고한 한 판사는 "검찰이 합리적 의심이 드는 상황에서도 증인심문을 제대로 하지 않아 재판부가 직권으로 증인을 심문해 유죄 정황을 확인했다"며 "제도 시행 5년이 지났지만 검찰의 무죄 구형과 불성실한 공소 유지는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지난해 인권보고대회를 통해 이 같은 문제점을 제기한 뒤 변호사 지정제 도입에 관한 입법 의견서를 준비 중이다. 국회에서도 지난해 7월 민주당 박영선 의원 등이 이 같은 취지를 담아 발의한 형소법 개정안이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민변 사법위원회의 이혜정 변호사는 "권 변호사 사건처럼 검찰이 재정신청 사건에 대해 재수사를 하지도 않고 형식적으로 기소한 뒤 무죄를 구형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면서 "검찰의 기소독점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변호사 지정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재정신청(裁定申請)
고소ㆍ고발인이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불복해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 법원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일 경우 검사는 반드시 피고소ㆍ고발인을 기소해야 한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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