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압력에 굴복한 정부에 화가 난 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대가 8일(현지시간) 공산정권인 소련을 세운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동상을 쓰러뜨렸다.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얼굴을 가린 시위대 30여명이 이날 저녁 수도 키예프 시내 베스사라프스카야 광장에 서 있는 레닌동상을 철거했다. 경찰 대변인도 "마스크를 쓴 시위대가 레닌 동상을 넘어뜨렸다"며 "이들은 극우 민족주의 성향 야당인 자유당(스보보다)의 푸른색 깃발을 휘둘렀다"고 말했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로, 1917년 11월 혁명을 일으켜 공산정권인 소련을 세운 인물이다.
미국 CNN 방송화면과 뉴욕타임스 동영상 장면을 보면 시위대는 3.45m 높이의 레닌 동상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목에 올가미를 씌우고는 케이블을 연결, 10여분간 끌어당긴 끝에 육중한 동상을 쓰러뜨렸다. 약 7~8m 높이의 주춧돌 위에 있던 레닌 동상은 머리 부분부터 뒤로 넘어지며 땅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목이 부러졌다. "저 공산주의자를 목매달아라"라고 부르짖던 시위대는 동상이 쓰러지자 환호성을 질렀다. 일부는 "다음은 야누코비치 대통령 차례"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들은 도끼와 망치로 쓰러진 동상을 부숴 1.7㎞ 가량 떨어진 반정부 시위 주 무대인 독립 광장으로 옮겼다. 동상 조각을 기념품 삼아 가져간 이도 있었다. 시위대는 동상 주춧돌에 우크라이나 국기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옛 소련군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한 우크라이나 반군을 상징하는 깃발을 내걸었다. 스보보다당은 "소련 점령의 종식과 우크라이나의 독립, 전제적인 과거와의 단절, 역사적 정당성 복구 등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문명과 문화의 영역에서 벗어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알렉산드르 포포프 키예프시 국가행정실 실장도 "이번 사건은 민주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공공기물 파손 행위로 규정했다. 키예프시 경찰청은 레닌 동상 철거를 비롯한 '대규모 난동'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46년 12월에 세워진 이 레닌 동상은 키예프 시내에 있다가 철거되거나 부서진 다른 동상과 달리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다. 그러나 이 동상도 2009년 얼굴과 왼손 부분이 훼손되는 등 수 차례 수난을 겪다 결국 최후를 맞고 말았다.
서방 언론은 레닌 동상 철거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의 영향력에 대한 명백한 거부를 나타낸다"고 분석했고, AFP통신은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나 1991년 소련 공산정권 붕괴 당시 비밀경찰(KGB) 창설자 펠릭스 제르진스키 동상이 성난 군중에 철거된 사건 등 상징적인 장면들이 연상된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집회에 참여한 시위대 수십만명은 EU와의 협력협정 체결 무산에 항의하고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깊은 우려를 전달하고 야당과의 대화를 촉구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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