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권력 2인자에서 실각된 장성택(67)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와의 결혼으로 권력 핵심부에 진입한 뒤 몇 차례 실각하는 부침을 겪었으나 그 때마다 재기했다. 하지만 이번 숙청은 그의 신변마저 보장키 어렵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파란만장한 40여년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장성택이 북한 권력 2인자로까지 발돋움한 힘은 무엇보다 김경희 때문이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종합대 재학 중 김경희와 교제한 시절부터 기회와 동시에 위기도 찾아왔다. 김경희와의 교제를 반대한 김일성 주석에 의해 원산 농과 대학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김경희의 설득 덕택에 김일성종합대로 복귀한 그는 1972년 김경희와의 결혼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78년 동평양의 외교부 초대석에서 측근을 모아 연회를 벌이다 김정일의 눈 밖에 나 제강소 작업반장으로 쫓겨났다. 사실상 정치 인생의 첫 시련이었다. 당시 장성택을 구해준 것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으로, 김정일에게"용서해달라"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승승장구한 장성택은 94년 김 주석 사망 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핵심 실세로 부상했다. 김 위원장이 "김경희는 나의 분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여동생에 대한 신뢰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2년 1월 국가예산을 횡령한 혐의로 사회안전부의 처벌을 받으며 다시 고비를 맞았다. 당시 장성택은 김경희와 강원도에서 요양하며 유배 생활을 보냈다. 다시 업무에 복귀한 그는 2004년 보다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권력욕에 의한 분파 행위'를 이유로 모든 업무가 정지됐고 측근들도 숙청됐다. 당시 그의 실각은 후계 구도를 둘러싼 내부 '암투설' 때문으로 알려졌으며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의 견제설 등 다양한 관측이 나왔다. 당시 장성택 김경희 부부는 김정남과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택은 고영희가 사망한 후인 2006년 재기해 권력의 중심에 다시 올랐다. 노쇠해진 김 위원장이 여동생에게 의존하면서 그의 위상도 더욱 높아졌다. 2008년 8월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부터 사실상 2인자의 위치에 올랐고, 이듬해 김 위원장에게 김정은 후계자 낙점도 직접 건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 후계 구축과 권력 승계 과정을 총괄하는 후견인의 역할까지 자임한 것이다.
김정은 체제에서는 "장성택 김경희 부부가 섭정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올 정도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2인자를 용납하지 않는 북한 유일체제의 특성상 그 지위는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김정은 집권 2년차인 올해 들어 그의 공개 활동이 급감하기 시작해 결국 숙청으로 마감됐다. 그가 산파 역할을 했던 김정은 체제로부터 비수를 맞은 격이 됐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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