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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엌 그녀의 식탁] <3> 건축가 안경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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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엌 그녀의 식탁] <3> 건축가 안경두

입력
2013.12.0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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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언어는 때론 노골적이라 할 만큼 강력하다. 대형 마트의 미로 같은 구조는 '나가지 말고 더 사'라고 외치고, 고급 스파의 낮은 조명은 '복잡한 일 모두 잊고 쉬세요'라고 속삭인다. 음식을 먹는 공간도 마찬가지라 벽에 식욕을 촉진하는 주황색 페인트를 발라 '많이 드세요'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다. 그러나 비만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요즘, 덮어놓고 많이 먹으라는 말은 다소 시대착오적이다. 공간이 '먹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말 중 좀더 동시대적인 건 없을까?

건축가 안경두는 오랫동안 음식과 음식이 담기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왔다. 뉴욕에서 9년 간 건축설계사로 일한 그는 2004년 귀국해 건축ㆍ인테리어업체 비안디자인을 차렸다. 영화사 CGV의 극장, 엔터테인먼트 회사 YG의 신사옥, CJ E&M센터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맡은 비안디자인은 특히 외식 공간 디자인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갤러리아 백화점 지하의 푸드코트 '고메이 494', 제과점 뚜레주르, 디저트 카페 코코브루니 등 최근 인기 있는 식당과 카페의 공간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가 5년 전 조명디자이너인 아내와 함께 청담동에 문을 연 식당 테이스팅룸은 지금 이태원, 서래마을까지 지점을 늘렸다. 먹는 공간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일까.

"식당에서 지불하는 돈에는 음식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죠. 밥을 먹는 1~2시간 동안 공간의 구조, 소리, 온도를 모두 사는 것입니다. 요리를 먹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취향을 공간도 갖고 있어야 하는 건 물론이죠."

테이스팅룸 이태원점은 45년 된 다세대주택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다. 안씨는 개축 과정에서 벽과 천정, 기둥을 그대로 노출하는 방식을 택했다. 낡고 오래된 건축재가 여과 없이 드러난 공간은 재료에 대한 가공을 최소화한 테이스팅룸의 음식과 통하는 데가 있다. 피자를 변형한 플랫 브레드는 신선한 시금치를 듬뿍 올린 것만으로도 훌륭한 맛을 내고, 토마토 소스로 요리한 뇨끼(이탈리아식 감자 수제비)는 접시 위에 얌전히 담기지 않고 프라이팬 채 식탁에 나온다.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어려운 음식보다는 쉬운 조리법과 흔한 재료들로 만든 소박한 음식을 선호합니다. 공간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천재적인 건축가가 솜씨를 발휘한 공간보다는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든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공간이 이곳 음식들과 어울리지 않을까요?"

건축만큼 음식에도 관심이 많았던 안씨는 뉴욕에서 일할 때 프렌치컬리너리스쿨(FCI)에서 정식으로 프랑스 음식을 배웠다. 당시 국내 잡지에 뉴욕의 레스토랑을 소개하는 칼럼을 썼던 그는 한 달에 10곳 이상의 레스토랑을 다녔는데 그 중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식당이 있다. 소호거리 한 호텔의 지하에 있던 그 레스토랑은 먹는 곳과 요리하는 곳의 경계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치 가정집 같았어요. 집도 요리하는 공간이 숨겨져 있지 않잖아요. 그곳에서는 주방에서 팬에 기름을 두르기 시작할 때부터 식사가 시작돼요. 치지직 거리는 기름 소리, 연기, 고기 익는 냄새…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손님들은 마치 요리에 참여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돼요. 요즘 사람들은 음식을 소비할 때 어디서 누가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 채 사잖아요. 식당도 그렇고 마트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 식당에서 손님은 소비자이면서 생산에도 일부 참여할 수 있었어요."

이 때의 경험은 그가 3년 전 뚜레주르의 내부 공간을 리모델링할 때 영향을 끼쳤다. 빵을 구워 식힌 후 비닐에 포장해 진열하던 기존의 방식을 뒤집어 빵을 오븐에서 꺼낸 선반 그대로 진열대 위에 놓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 주방 기구 일부를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음식의 출처를 암시하고 소비자를 안심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으나 당시의 반대는 엄청났다.

"요즘 세상에서 익숙함은 곧 효율이거든요.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이 변화를 반대했어요. 지금은 많은 빵집에서 이 방식을 택하고 있지만요."

주방을 손님에게 열어 보이는 오픈 키친 구조는 최근 차용하지 않는 식당이 없을 정도로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이 말해주는 건 뭘까. 음식의 최종 유통단계에 뚝 떨어져 소비만을 강요 받는 현대인들의 불안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요리하는 내내 냄새와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 음식이 지금 막 요리사의 손을 떠나 주방의 열기를 뜨겁게 품은 채 식탁에 당도해 말한다. "안심하고 맛있게 드세요."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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