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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12월 9일] 중산층은 마음 둘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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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12월 9일] 중산층은 마음 둘 곳이 없다

입력
2013.12.08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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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에서 시작된 감원 바람이 보험, 카드를 거쳐 은행까지 확산되며 금융가의 연말을 더욱 스산하게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한 증권사 최고경영자(CEO)가 "구조조정으로 사기가 떨어졌다"는 직원의 우려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동기 부여를 해야 한다는 착각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가정이 깨지는데, 제가 왜 여러분에게 동기 부여를 해야 합니까. 제가 여러분을 낳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기업 사장의 입에서 미국 월스트리트를 무대로 한 영화 대사 같은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학교에서는 기업이란 이해관계가 우선되는 2차 집단으로 가족 같은 1차 집단과 구별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직장은'받는 돈만큼 지식, 힘 그리고 시간을 지불하는 조직'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산업화와 함께 형성된 중산층의 경우 대부분 직업을 통해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래서 흔히 꼼꼼한 사람을 회계사나 공무원 같다고 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세일즈맨이냐고 되묻는 것이다. 직장동료는 함께 힘을 합쳐 경쟁사를 앞서야 하는 팀 메이트나 승진을 놓고 겨뤄야 하는 경쟁자일 뿐만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가는 솔 메이트다. 이런 점에서 앞에 언급한 증권사 CEO는 자신이 통솔하고 있는 회사를 단순히 밥벌이 수단으로만 폄하하는 일종의 배임을 저지르고 있다.

불행히도 이런 CEO는 그 한 사람뿐이 아니다. 1990년대 영ㆍ미식 신자유주의 바람이 전세계를 휩쓸면서 감원을 통해 기업의 수지를 개선시키는 근시안적이고 비윤리적인 회사운영을 첨단경영이라 부르고, 동료 직원을 마구잡이로 해고하는 CEO를 유능하다고 평가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정보기술(IT)혁명은 중산층이 담당하는 중간단계 기술직종 대부분을 쓸모 없는 일자리로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점점 희미해지고, 직업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던 중산층은 심각한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중산층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직장뿐이 아니다.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정치권도 그 동안 양쪽의 주장을 상식적으로 절충해 온 중산층의 판단력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청와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용납ㆍ묵과하지 않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같은 절대왕조 군주에게나 어울릴 발언을 내놓는다. 반대파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절충점을 모색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라, 이념적 중간층은 고개를 움츠린 채 누가 이길지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지난 주말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제자리인데 부정적 평가는 상승하는 어정쩡한 결과가 나온 것도 중산층의 혼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악으로 치닫는 내수 소비부진은 이런 중산층 혼란의 경제적 결과다. 최근 발표된 2013년 '가계금융ㆍ복지조사'와 '사회조사 결과'는 이를 통계적으로 확인시켜준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침체 터널의 끝이 점차 가시화하면서 올해 우리나라 중산층에 해당하는 소득 상위 20~60% 집단은 자산과 소득이 모두 지난해보다 증가했다. 하지만 직장도 사회의 미래도 불안하다고 판단한 중산층은 지갑을 꽁꽁 묶어놓고 있다. 특히 중상계층이라 할 소득 상위 20~40%가구는 자녀 교육비뿐 아니라 식료품 소비마저 줄이는 초긴축 생활을 하고 있다.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스스로를 하층민이라 규정하는 비율이 46.7%에 달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앞으로 노력하면 지위가 높아질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28.2%까지 줄어들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수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한국의 경제회복은 내수가 회복돼야 가능하다고 진단한다. 내수가 활력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중산층이 지갑을 열어 자신과 자녀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고 소비에 나서야 한다. 중산층이 다시 뛸 수 있도록 마음 둘 곳을 마련해주려는 정부, 정치권, 기업의 각성과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정영오 경제부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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