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 무용인 김영순최승희의 무용 직접 사사 삭혀지지 않는 삶의 응어리 '보물' 예빈 만나며 희망으로"보살춤·물동이춤·진주무희… 100가지 춤 모두 전수해 줄 것"● 중간자역 자임 어머니 김미래이매방류 살풀이로 명인 반열"한국무용 시대 맞게 재창조예빈을 계기로 주목받게 되기를"● 호기심 많고 당당한 10대 석예빈"폭넓은 인간관계 경험하고 싶어" 예체능계 마다하고 일반고 선택'최승희 댄스로드' 꿈에 흠뻑 北에서도 꼭 공연해보고 싶어"
'최승희를 꿈꾸는 꼬마 춤꾼''리틀 최승희'(일어잡지 'Korea Today' 2004년 6월호 기사 제목)….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을 때부터 석예빈(16ㆍ은광여고1)은 최승희와 한 묶음으로 불렸다. 그를 애지중지하는 부모와 주변인들의 기대치이기도 했고, 본인 스스로가 내면화한 삶의 목표이기도 하다.
최승희가 누구인가? 생시에 동양의 진주라는 해외 평단의 상찬 속에 세계를 누비다 이데올로기의 사슬에 묶여 북한에서 비극적 삶을 마감한 무용가다. "나의 조선풍 무용이란 것이 완성의 영역에 다다르지 못한 데에 틀림없을 것입니다마는 나는 나의 무용 속에서 동양적인 빛과 내음새를 캐내어 보고 찾아보자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생전에 그가 밝힌 자신의 예술관은 새 한국 예술의 꿈을 선취하고 있었다. 석예빈은 그 메시지를 포착한 것이다.
2010년'최승희 추모 앨범'이라는 부제를 달고 자신의 노래를 담은 CD '난 춤을 춰요'를 발표해 화제를 모았던 그는 어느덧 고1. 몸의 성숙을, 내면의 자아가 받치고 있었다. 지난 7월 인가 받은 사단법인 김미래문화예술통합연구회의 연습실에서 그는 최근 자신에게 들이닥친 세간의 관심을 의젓하게 받아 넘겼다. 매체에 적극 응하는 행보에 대해 "단지 한국 무용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덕택에 외국인들도 우리 춤에 관심 갖게 됐다고 해요. 발레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한국인이라 해서 사정이 나을까. 해외 콩쿨 입상에 유독 민감하다.
1967년 북한에서 숙청된 후로는 일반이 접하기 힘들게 된 최승희 춤의 알맹이가 남한 땅에서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은 탈북 무용인 김영순(73ㆍ탈북자예술인 총연합회 대표이사)씨 덕이다. 예빈 양 일가를 만나던 날, 김씨는 기꺼이 자리를 함께 했다.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에서 최승희로부터 직접 배운 뒤 인민군협주단 무용배우(중위) 등으로 북한 예술계에서 활약하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인 요덕관리소에 9년 동안 수감되는 등 파란의 시간을 겪은 주인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유쾌했다. 2009년 를 써냈을 만큼 김정일의 사생활을 깊이 안다는 것이 북한을 떠나야 했던 이유였지만, 남한에 와서 제 2의 삶을 살고 있다.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하버드대와 로마대에서 강의했고 미국 의회 청문회에도 증언했던 그가 여생을 바쳐도 하등 아깝지 않은 예빈을 만났다."나는 예술가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최승희 춤을 만난 행운아지요." 자신의 육체에 각인된 그 춤은 미래로 닿는 길이다. "예빈의 보살춤은 물동이춤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춤으로 태어날 거예요."
김 씨는 2006년 한 종교 방송을 통해 기구한 인생담이 알려지면서 석 씨 일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예빈을 만난 것은 마지막 큰 선물인 셈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최승희 무용의 기본에 대해 6개월 간 특강을 하기도 한 그의 눈은 정확했다. 제자로 가르치던 김미래(47)씨를 통해 그의 딸 예빈을 알게 된 그는 전설로만 남은 춤을 가르칠 수 있게 된 사실 자체가 감사하다. 김미래씨는 2004년 전주대사습에서 승무, 살풀이, 태평무, 춘앵무 등으로 장원하기 앞서 1986년 동아 콩쿨에서 승무로 우승하는 등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나의 춤은 기교적이고 화려한 이매방류의 승무, 단아한 한영숙류를 연상케 하는 깨끗함 등 유파별 특성을 겸비한다"고 자신을 요약했다. 최승희의 춤에 대해서는 "어떤 동작이든 추는 이의 개성에 어울리는 특성이 있다"며 그것이 곧 "추는 사람의 개성이 적극적으로 표현되는 이유"라고 말했다. 딸의 미래에 대한 기대다.
노대가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예빈의 놀라운 능력을 단번에 알아봤다. 김영순씨는"육체적으로 성숙 중인 예빈에게 앞으로 보살춤 물동이춤 진주무희 조개춤 봉선무 옥패춤 굿 춤 등 최승희의 100가지 춤을 다 전해줄 것"이라 자신한다. 20세가 되면 체격에 맞는 춤사위를 구상해 줄 요량이다. "23세쯤 되면 최승희의 춤을 완전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거예요."
뒤늦게 만난 보물이라 더욱 소중하다. 그는 나아가 자신이 예빈의 세계 무대 진출에 디딤대가 됐으면 한다. 최승희 _김영순 _석예빈이라는 계보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그와 최승희는 운명 공동체다. "최승희의 돗자리를 깔고 ?것"이라 그는 말했다.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미 의회 청문회 증언도, 하버드 대학 강좌도 했다. 그러나 응어리는 삭혀지지 않는다. "탈북자라고 항상 뒷전 신세죠. 더구나 누가 최승희 것을 배우려 드나요?" 그러나 그에게 희망이 왔다. "앞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 교본도 쓸 거예요. 굿거리_안당(자진모리)_살풀이_타령 등 순서와 함께 엇박자 원리 등 기초 이론도 정립해서요." 새 각오를 받쳐줄 만큼 다행히 매우 건강하다. 최근 북한 정세와 관련, "김정은에 대한 남한의 대응은 남한에 대한 김정은의 자신감만 키워줬다"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최승희의 적통이다. 두 사람이 사제의 연을 맺은 평양종합예술학교는 배경과 미모를 갖춘 재원들 중 20~40 대 1의 경쟁을 뚫은 학생 중 한 기에 15명만 졸업생을 배출한 엘리트 코스다. "결국 당의 선전 도구로 되지만요."
그는 "최승희 이론에 따른 실기를 완벽히 구사하는 것은 나뿐"이라며 "머리가 허락하는 한 완전히 정리해 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최승희 춤의 요체는 날렵함이다. "한국의 전통 춤에는 없던 예각, 직각을 구사한 송곳 같은 춤사위로 보는 이를 황홀하게 만드는 춤이었죠." 그는 "피카소가 최승희의 춤을 보고 눈이 풀리며 침을 흘리더니 그 춤의 크로키를 그려서 주었다"고 말했다(실제로 위키피디아는 최승희가 피카소, 장 콕토와 교류했다고 서술한다). 바로 그 날렵함으로 세계에 영향을 끼친 유일의 20세기 한국무용가가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중간자적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예빈의 어머니 김미래씨는 "김연아로 피겨가 일반에 친근해졌듯 예빈에 의해 한국 무용이 주목 받게 되기를 바란다"며 "전통 한국무용은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고 대중화의 길로 한국무용을 시대에 맞게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딸의 작업을 이해한다. 세월의 두께가 보인다. 이매방류의 살풀이로 명인 칭호를 딴 그는 "진정한 일인자만이 살아남는 예술가의 길을 알기에 나는 예빈이가 방송에 나가는 것을 굉장히 반대했다"고 돌이켰다. 그러나 예빈이 무대 나가는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던 터다.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연습실에서 놀게 했을 뿐인데도요."결국 녹화 현장을 보고 전문 춤꾼으로 딸을 인정하게 됐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예빈은 춤꾼이기에 앞서 호기심 많은 10대다. 한 곳에 매몰되지 않고 그 나이에 허여되는 가능성을 당당히 누릴 줄 안다. 일반고를 택한 것부터 그렇다. "외곬이기 십상인 예체능계 학교보다 폭넓은 인간 관계를 경험하고 싶어서요."축제 때 장사익 노래에 맞춘 찔레꽃춤을 선보였던 자신감으로 다른 무용 장르도 배워 그 나이의 정서에 충실하려 한다. 예빈은 지금 '최승희 댄스 로드(dance road)'의 꿈에 사로잡혀 있다."히틀러와도 악수했다는 최승희 선생의 춤 길을 따라가며 그 춤을 부활시킬 거예요. 어떤 장르와도 통합될 수 있는 춤이니까요."
석예빈 일가는 예술인 가족이다. 아버지 석현수(50)씨는 사물놀이 등 국악의 기예를 익히고 현재 흑석동 중앙대 아트센터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K팝에 대한 세계적 열광은 한국적 정서가 그 핵심에 있기 때문"이라며 "이제 그 중심을 최승희로 만들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80년 전 교통 통신 기술이 전무했을 때 세계에 한국 무용의 가능성을 알린 유일한 인물 최승희가 사이버 시대를 횡단하는 법을 그는 연구 중이다.
예빈은 그에 앞서 최승희의 춤으로 하나 되는 남북을 꿈꾼다. 북한 가서도 공연하게 되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 " 북한 무용수들의 최승희 춤 영상을 구해서 봤는데요, 상당한 수준이지만 테크닉뿐이고 유연한 호흡이 안 보였어요. 그러나 유리 항아리를 들고 하는 등 고도의 테크닉이 인상적이었어요. 기회 되면 꼭 같이 추고 싶어요." 남북한의 최승희 춤을 비교ㆍ분석해 보고 싶다는 희망이다.
"제 2의 최승희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예빈은 자신의 목표를 압축했다. 영어는 물론 일어까지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도 이 목표를 위해서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