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8일 오후 11시가 넘은 늦은 밤. 서울 가리봉동의 이주민 복지시설 지구촌사랑나눔 건물은 화마에 휩싸였다. 이곳 쉼터에 머물던 중국동포 김모(45)씨가 1층 무료급식소에 불을 지르고 3층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나흘 만에 숨졌다. 그렇게 잿더미가 된 건물 앞에서 6일 만난 지구촌사랑나눔 대표 김해성(53) 목사는 "참담함과 분노, 용서,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차례로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급식소 내부는 아직 복구 공사를 시작하지 못했다. 불에 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전기선, 까맣게 그을린 벽면 등 화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화재로 급식소는 물론 이주민들을 무료로 진료하던 병원(2, 3층)과 오갈 데 없는 이들이 머물던 4층 쉼터도 문을 닫았다. 하루아침에 거처를 잃은 이주민 100여명은 빵과 근처 교회에서 제공한 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한동안 인근 건물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서 찬바람을 피해야 했다.
화재 발생 한 달 만인 11월 초 2~4층의 전기, 상하수도 시설 등 기본적인 복구 공사가 어느 정도 끝나 이들은 다시 원래 쉼터로 돌아왔다. 물론 아직 임시운영 체제다. 건물을 완전히 복구하려면 추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5년째 쉼터에서 지낸다는 중국동포 조덕자(73) 할머니는 "다시 쉼터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같은 중국동포가 한 짓이라 두고두고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이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두 달 전만 해도 쉼터를 다시 일으키는 일이 막막했다. 무엇보다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부상자들의 치료비 걱정이 컸다"고 했다. 골절과 화상 등 부상을 입은 중국동포 9명은 며칠 전까지 병원 신세를 졌는데, 한 사람 당 하루 입원비만 150만~200만원에 달했다. 이들 모두 일정한 직업이 없는 노인들이라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았고, 사랑나눔의 빠듯한 살림에 따로 화재보험을 들지도 못했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2001년 문을 연 이후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시설을 꾸려 오느라 수십억원의 빚에 허덕이지만, 화재 소식 이후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면서 부상자들의 치료비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 1억원 이상 드는 건물 복구작업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도움으로 조만간 시작될 예정이다. 김 목사는 "가사 도우미로 월급 80만원을 받는 70대 중국동포 할머니가 피난처에서 쪽잠을 자는 동포들을 보고는 모아둔 돈 150만원을 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쉼터를 일으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며 "방화범에 대한 미움도 십시일반 쏟아진 관심과 후원을 보며 눈 녹듯 사라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목사는 후원금으로 10월 말 김씨의 장례를 정성껏 치러줬다. 또 중국에서 할아버지가 혼자 키우고 있는 김씨의 아들(12)과 딸(4)도 조만간 한국으로 데려와 돌볼 생각이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잿더미 속에서 희망을 피워 내야죠."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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