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랑한다면 그의 비평을 읽어보시라英 출신 비평가 히친스의 서평집… 식도암 사망 1년 전 쓴 글도 포함신랄함 속 균형과 진실 담아내조앤 롤링 '해리포터' 다룬 글에선 "속편 안 나오길 바란다" 유머 빛나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만만하게 보고 시작한 죄다. 일단 목차부터 화려하다 못해 주눅이 든다. 국내에 소개된 책들이라고는 조지 오웰의 과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 힐러리 맨틀의 , 조앤 K 롤링의 , 이사벨 아옌데의 , 이언 커쇼의 (국내에는 으로 번역되었다) 등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책들은 풍문으로 들었거나 아예 들어보지 못한 책들도 제법 여럿이다. 영국 출신의 비평가이자 논쟁가였던 크리스토퍼 히친스(1949~2011)의 서평집 이야기다.
은 히친스의 선집 를 두 권으로 나눠 서평만을 담은 책이다. 나머지 한 권은 지난 4월 출간된 으로 정치와 종교, 문화와 관습에 대한 전방위적인 비평을 담고 있다. 본래 로 하나였던 과 은 결국 "따로 또 같이"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또한 에 담긴 몇몇 글들은 히친스가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기껏해야 1년 정도밖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쓴 것이다. "사람은 죽기 전의 말이 가장 진실하다"고 말한 증자(曾子)에 따르면, 과 에 담긴 히친스의 몇몇 글들은 진실하다. 진실한 만큼 강렬하고, 강렬한 만큼 읽는 이를 압도한다.
압도하는 이유는 또 있다. 그의 박식함이다. 혹자는 히친스가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것을 두고 '쓰레기' 취급하지만, 허영에 찬 지식 세계와 그것을 비평하는 그만의 아우라는 좌와 우를 아우르고도 남는다. "모든 1급 비평은 먼저 우리가 무엇을 대적해야 하는지부터 확실히 규정한다"는 재즈 비평가 휘트니 밸리엣의 말을 빌리자면, 히친스는 좌든 우든 상관없이 "무엇을 대적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규정"한 비평가였다. 그만큼 신랄했고, 그 신랄함은 읽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사실 히친스의 비평을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를 읽어야만 한다. 히친스는 이 책에서 종교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아닌 종교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유발한 "신의 자기모순"을 거침없이 질타한다. 신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 편이 훨씬 낫다"고 주장할 정도다. "인간다운 판단과 실천"만 제대로 선다면 신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게 히친스의 생각이다. 이런 이유로 히친스 타계 당시,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무신론자들과 안티 기독교인들은 그의 부고를 트위터 등을 통해 실어 나르기도 했다.
다소 거칠어 보이는 히친스의 행보는 단지 종교를 비토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라는 허울로 규정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과 가치관을 찾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세계인이 성녀로 추앙하는 마더 테레사를 비판한 와 그가 평생 화두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베트남 전쟁의 막전막후 주역인 키신저를 평가절하한 을 이해해야 한다. 이 같은 배경, 즉 의심스러운 것은 물론 당연해 보이는 세계까지 좌와 우,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평해야 한다는 것이 히친스 비평의 준거였다.
히친스는 과 하나의 책인 서문에서 "제한과 금기 없는 대화"야 말로 "엄숙하고 경건한 사람들을 견제하는 법을 아는 사회의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유행이나 상업이나 자기검열이나 여론은 물론 어쩌면 지식인들의 의견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구속 요건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써야 한다"는 그의 비평 정신이 서평집인 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비평의 첫 대상은 피터 애크로이드가 쓴 뉴턴의 전기 이다. 히친스는 을 평가하기에 앞서 과학적 발견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일침을 가한다. 우리는 보통 뉴턴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중력의 의미를 알아차렸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뉴턴은 "빛과 색깔을 구분하고 싶다는 의욕이 넘친 나머지, 한 눈으로 태양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실험"을 하다가 사흘 동안 어두운 방에서 시력 회복을 할 정도로 연구에 매진한 "꼼꼼하게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과에 관한 일화나 유레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과학의 천재들을 좀더 인간적이고 임의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평범한 나도 언젠가 비범해질 수 있다는,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셀프 힐링'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을 히친스는 에둘러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히친스는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자신의 행보와 어울리는(혹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을 소개하는데, 바로 조지 오웰의 이다. 조지 오웰은 탄광지대 션窩?바탕으로 한 르포르타주 2부에서 1930년대 후반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던 '좌파 지식인'들을 호되게 비판한다. 이론적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애쓰는 듯 보이지만 실제 삶은 "구질구질한 사회적 위신에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이 일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 표적이 되었지만, 오웰은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어떤 점에서 히친스의 전향과 사회주의 비판도 이런 정황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히친스는 서문 중 한 대목, 즉 "나는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원한다면 소비에트의 신화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고 확신했다"는 내용에 대해 "아름다움과 소박함"이 있지만 "기만적"이라고 평가한다. 인간과 돼지가 서로 구분하기 힘들 만큼 닮아버린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과 소비에트 신화를 구분할 수 있냐는 심각한 문제 제기인 것이다.
하지만 오웰의 치열한 기록 정신과 사회 비판 능력만큼은 배우고자 했던 히친스는 에서 "상당히 다른 형태의 르네상스를 감히 예언"한다. 시간을 초월해 인류의 삶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몇몇 문제들, 예를 들면 유신이 데자뷰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적 상황이 언제 어디서든 재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 것이 조지 오웰의 이라고 히친스는 주장하고 있다.
제목조차 생소한 명저(?)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치던 히친스의 시선에 걸린,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은 롤링의 이다. 히친스는 롤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풋풋한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 성공"했고, "죽어버린 언어에 대한 관심에 다시 불을 붙이는 데 도움"도 주었다는 것이다. "밤에 해리를 잠깐 만난 덕분에 문학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회고할 어른이 수백만 명이나 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업적"이라고까지 추켜세운다.
하지만 결정적 한 마디, "솔직히 나는 속편이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말로 에 대한 평가를 갈음한다. 난해하고 어려운 줄로만 알았던 히친스의 비평에 유머가 스며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대신 히친스는 영국의 아동문학 작가이자 판타지 작가로 등을 써 국내에도 잘 알려진 필립 풀먼의 작품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처럼 은 아주 가끔이지만 유머와 함께 친절함도 빛난다.
솔직히 말하면 은 평범한 독자가 소화하기에 어려운 책이다. 과 의 번역을 맡은 번역가 김승욱씨도 "과연 번역가가 어디까지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수도 없이 고민했다고 한다. "아예 우리말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어려운 단어"는 준수한 편이었다. 문장 하나에 책 서너 권이 소개될 정도로, 그래서 옮긴이 주를 수도 없이 달아야 하는 작업이 주는 괴로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봄 직하다. 비평의 수준이란 단순히 박식함을 넘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좌와 우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도 그렇지만, 삶의 끝자락에서 그가 깨달은 비평에 관한 진실이 "우리에게서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히친스에게 비평은, 식상한 말이지만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한 가지 바람은 히친스가 에서 소개한 주옥 같은 책들이 속히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때론 신랄한, 하지만 유머와 친절, 균형 감각이 넘치는 히친스의 비평만으로도 출간되기에 마땅하다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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