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출근을 서두르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시계를 확인하며 그 숫자에 따라 움직이고자 노력한다. 눈을 뜨자마자 흉측한 해충으로 변한 아침인데도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시곗바늘이 오전 6시 45분에 가까운 것을 보자마자, 4시에 맞춰 우는 자명종 소리를 듣고 깨지 못한 스스로를 꾸짖는다. 그리고 5시 기차는 놓쳤으니 어떻게든지 7시 기차를 타려고 미친 듯이 서두른다. 그러나 잠자는 영원히 기차를 탈 수 없다. 사람에서 해충으로 변한 충격적인 상황은 뒤로 한 채, 출근 시각을 넘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잠자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도 서글픈 우리네 자화상이다.
숫자놀음이다. 조간신문을 펴면 각종 숫자들이 우리를 포위한다. 미세 먼지 농도, 바람의 세기와 기온부터 환율과 주식 등락폭까지 어지럽다. 하나의 숫자를 지역별로 나눠 분석하기도 하고 국경 너머 다른 나라와 엮기도 한다. 오늘의 숫자는 어제의 숫자 혹은 작년 같은 날의 숫자와 비교되며, 그 차이가 또 새로운 숫자로 병기된다. 이 많은 숫자 속에서 우리는 기껏 한두 개만 확인하고 기억할 뿐 나머지는 무시한다. 점심시간만 넘겨도 새로운 숫자들이 우리의 눈과 뇌를 괴롭힐 것을 알기 때문이다.
범람하는 숫자 중에서 유난히 행운과 이어진 숫자가 있다. 7이다. 4의 경우 네잎클로버는 행운을 부르지만, 병원에선 죽을 사(死)를 연상시킨다며 4층이란 표시를 없앤 건물도 많다. 7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는 매우 드문 편이다.
시인 박상순은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라는 시에서 숫자와 사물을 하나씩 대응시켰다. 6은 7보다 작지만, 나무는 돌고래보다 작다고 할 수 없다. 또 9인 코뿔소가 8인 비행기보다 크지도 않다. 7에서 6을 빼면 1이지만, 돌고래에서 나무를 과연 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시에 등장하는 첫 번째는 '나'다. 1에서 1을 억지로 뺀다면? 나는 영영 사라지고 말까.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이들의 삶을, 누구는 칠전팔기라 하고 누구는 사전오기 오전육기 육전칠기 팔전구기라고도 한다. 칠전팔기라고 했을 때 일곱 번의 좌절이 항상 똑같은 슬픔과 고통을 안기지는 않는다. 고생의 총량이 좌절의 횟수에 정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그 삶을 탐구하는 목적과 방식에 따라, 일곱 번의 좌절은 네 번으로 줄기도 하고 열 번으로 늘 수도 있다.
7은 또한 일주일의 길이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주일을 7일로 생각하진 않는다. 가수 시와가 부른 '마시의 노래'는 여행자 김마시가 아일랜드에서 우연히 만난 어부의 삶을 들려준다. '여섯 날은 배 위에서/ 두 날은 섬 위에서' 지내기 때문에, 이 어부의 일주일은 여덟 날이다. 세상사람 대부분의 일주일이 7일일 때, 8일을 일주일로 삼은 이의 일상은 어떨까. 노래를 듣는 내내 그 어부의 8일을 상상하며 즐거웠다. 다수가 합의하고 지킨다 하여 그 숫자가 절대적인 틀이 아님을, 아일랜드 어부가 김마시를 통해 시와의 목소리로 내게 차분히 일러주는 느낌이었다.
행운을 불러온다고 알려진 숫자 7을, 나는 한 동안 죽음의 숫자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응제왕' 편의 마지막 일화 때문이다. 남해의 임금 숙(儵)과 북해의 임금 홀(忽)은 평소에 자신들을 잘 대접한 중앙의 임금 혼돈(混沌)의 은덕을 보답하기 위해 이렇게 상의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쉴 수 있는데, 혼돈만이 구멍이 하나도 없으니 구멍을 뚫어주자고. 하루에 한 구멍씩 뚫었더니 혼돈은 칠 일 만에 죽고 말았다. 죽은 자의 이름이 혼돈인 것이 예사롭지 않다. 확실한 숫자로 가두지 않으면 혼돈이라 여기고 못 견뎌하는 이들이 숙과 홀만은 아니리라.
돌고래, 출근 시각, 좌절한 횟수, 일주일의 길이, 몸에 뚫린 구멍의 수, 가수의 이름, 이 칼럼이 실리는 날짜. 지금 당신의 7은 무엇인가.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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