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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12월 6일] 환각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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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12월 6일] 환각의 시대

입력
2013.12.05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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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한 TV 드라마를 보았다. 청춘 남녀가 클럽에 다니고, 술 마시고 춤추고, 입맞춤을 하기에 흔한 연애 이야기려니 했다. 가족 갈등이나 삼각관계, 주먹질까지 여느 애정물 그대로다. 주인공들의 호화판 생활 또한 국내 TV드라마, 특히 신데렐라 이야기의 기본장치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보다 보니 주인공들이 사회인은커녕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이다. 대한민국 경제력 상위 1%(실제로는 상위 0.1%에 더 잘 어울리겠지만) 집안 자녀들만 모은 '특수학교' 학생들이다.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끌려가도 바로 나오고, 마음만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고등학생들의 이야기가 초저녁도 아닌 밤 10시에 방영된다는 게 놀랍고, 서민층 주부들이 주된 시청자라니 더욱 놀랍다.

궁금해서 이 드라마를 즐겨 본다는 주위 아줌마들에게 물어보았다. 의외로 주인공의 연령층 설정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없었다. 거꾸로 주인공들의 청순한 모습이 신데렐라 이야기의 상투성을 줄여 대리만족의 즐거움을 끌어올린다는 평이었다. 남녀와 세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참 사람의 감각이 많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20%대가 넘는 시청률을 자랑하는 이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이 단순히 대리만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신데렐라처럼 백마를 탄 왕자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는 10대 소녀나 20대 처녀의 일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중년으로 접어든, 가정 있는 아줌마들까지 극적인 인생 반전의 기회를 원망(願望)하고 있다니. 관찰자의 눈에는 눈먼 거북이 바다 위로 떠오르다 나무 막대기에 부딪치는 것보다 어려운 헛된 기대로 비치지만, 아줌마들의 기대는 훨씬 짙고 구체적이다. 드라마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허구와 현실의 세계를 구분하는 공간지각 능력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허구의 사실화는 드라마가 허황되게 묘사한 행위나 사건에까지 미친다. 현실에서 돈 있다고 법적 절차를 그리 가벼이 피하고, 살인교사까지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아줌마들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실제로 그렇게 굴러가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당장 굵직굵직한 대기업 총수들이 철창에 갇혀 있지 않느냐, 살인교사라면 돈이나 권력이 아닌 '기술'에 달린 문제여서 재벌이나 정권보다 범죄조직이 훨씬 뛰어나지 않겠느냐고 한참을 떠들고서야 겨우 "그런가"하는 단계에 이를 수 있었다.

이런 현실 인식이라면 사이버 공간에서 매일같이 수천 명을 베고 찌르고 쏘아 죽이는 주인공에 스스로를 동화시킨 결과 대낮에 칼을 휘둘러 사람을 다치게 하고도 아무런 가책이 없는 10대 게임중독자와 다를 바 없다. 모든 허구가 애초에는 현실과의 거리 때문에 감동과 흥미를 부르지만, 깊이 빠지면 점차 그 거리가 지워진다. 끝내는 환상과 현실이 완전히 겹친 환각 자체를 즐기게 되는 게 중독의 기제다.

공간지각의 착란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야당과 진보적 시민단체가 시작한 '독재' '유신 회귀' '공안통치' 등의 말이 사회저변으로 널리 퍼졌다. 대선에서 YS에 진 DJ가 야당 총재 시절 YS 정권을 '3독(독단, 독주, 독선) 정권'이라 부르면서도 한사코 쓰지 않았던 말들이다. 문민정부의 출범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던 그의 역사공간지각 때문이다.

자기 주장을 부각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정치적 과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주장을 퍼뜨리기 위한 천막농성에 나서면서도 정권의 독재ㆍ공안적 대응조치를 상정할 필요가 없지 않았나. 그런 '독재정권'을 국민의 과반수가 지지하는 실상은 또 무엇인가. 공안통치가 두려워서? 솔직히 그런 두려움을 마누라 바가지나 직장 상사의 부정적 평가보다 무겁게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함축의 언어를 즐기는 종교나 예술계라면 몰라도 사실의 언어에 치중해야 할 정치ㆍ사회 단체라면 가급적 피해야 할 환각적 인식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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