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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2월 6일] 왜 나는 네가 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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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12월 6일] 왜 나는 네가 될 수 없는가?

입력
2013.12.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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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상반기의 일이다. 나는 장애인 차별구제소송으로 법정에 출석했다. 지체 1급의 여성장애인이 평소 지하철 역사 내 남녀 구분이 없는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수치심과 불쾌감을 느껴왔고, 지하철 이동편의시설이 미비하여 큰 불편을 겪었던 사안이었다. 이에 대해 손해배상과 더불어 장애인차별금지법에 근거하여 피고인 지하철공사에게 해당 지하철역의 장애인 화장실을 남녀 구분하여 설치하고, 지하철 승강장과 환승 통로 사이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직접 차별뿐만 아니라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애 유형이나 특성 등을 고려한 편의시설이나 조치가 제공되지 않은 경우(이를 '정당한 편의제공의 거부'라고 한다)에도 이를 차별로 규율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 차별구제소송에 있어서 차별에 대한 금전배상뿐 아니라 피해자의 청구에 따라 차별행위의 중지 등 차별시정을 위한 적극적 조치를 법원에서 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규정은 차별구제를 위해 매우 의미 있는 규정임에도 법원은 이 규정을 사실상 외면해왔다.

그날 나는 변론 기일에 출석하여 매우 당황스러운 경험을 해야 했다. 그때 원ㆍ피고 대리인이 출석해서 있었고, 그 외에 방청석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재판장은 나에게 장애인용 화장실을 남녀로 구분하여 설치하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는 판결이 가능하냐고 반문했다. 나는 200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장애인차별금지법상 법원의 적극적 시정조치 규정을 근거로 차별이 인정되는 경우에 그같은 판결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재판장은 혼잣말로(그러나 마이크가 앞에 있어서 그 법정에 있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염두하며) 국회의원들이 표나 의식해서 예산도 고려하지 않고 법을 만들어대니까…" 라고 했다. 당시 나와 함께 갔던 자원활동가도 들었다고 했으니 내가 잘못 들은 얘기는 아니었다.

판사는 무엇을 근거로 판결을 하는가.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는 과연 무엇인가. 판사는 (재판 당시 시행되고 있는)법에 근거하여 판결을 하는 것이고,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란 (조선시대의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는 식의 원님재판이 아닌) 법에 근거하여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법에 근거해 재판을 해야 할 판사가 해당 법을 만든 입법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있어선 안될 일이다. 물론 법에 대해 판사 개인의 소신과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행 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취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법으로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이 할 말은 최소한 아닌 듯하다.

몇 해 전에는 어느 1심 법원에서 지적장애를 가진 10대 소녀를 무려 8년간이나 상습적으로 성폭행한 피해자의 친할아버지, 큰아버지, 삼촌 등 가족 4명에 대해 모두 집행유예를 선고한 적이 있었다. 친족간 성폭력이자 정신지체장애아동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점에서 성폭력특별법에 따라 이중ㆍ삼중의 가중처벌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시켜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원칙을 무시하고 가해자들에게 다시 피해자를 보호하라고 하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장애인은 예산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이 당연시되며, 장애인에 대한 성폭행은 너무도 가볍게 여겨지는 것인가. 그것은 장애인의 문제, 소수자의 문제가 나의 문제 혹은 내 가족의 문제로 치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저히 그들만의 문제이고, 사회 전체로 보면 한줌도 안 되는 극히 미미한 문제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공간에 내던져진 취약한 존재이고,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에 급급한 수치심이 가득한 존재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방법 밖에 없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바로 "나도 그래."라고 하는 '공감'이다.

염형국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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