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뒤주가 있다. 뒤주에는 마치 지게라도 되는 양 어깨 끈이 달려있다. 사도세자가 숨을 거둔 좁지만 무거운 공간, 이것의 다른 이름은 삶의 무게다.
14일부터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 오르는 연극 '혜경궁 홍씨'(이윤택 작ㆍ연출)에는 뒤주가 중요한 오브제로 등장한다. 남편 사도세자를 뒤주로 몰아넣었다는 소문 속에서 결국 아들 정조에게마저 버림을 받은 혜경궁 홍씨. 그에게 이 뒤주는 사도세자의 명줄을 끊어버린 형틀 이상의 의미였다. 2일 국립극단 연습실에서 만난 이윤택 연출가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여자, 혜경궁 홍씨가 을 쓰는 행위를 통해 한을 풀어내고 시련을 견뎌낸 모습을 그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혜경궁 홍씨(김소희)의 회갑을 맞아 정조(정태준)가 화성행궁에서 성대한 진찬례를 준비한 하룻밤 이야기다. 을씨년스러운 밤, 혜경궁 홍씨는 꿈을 통해 수십 년 전 남편 사도세자(최우성)와 시아버지 영조(전성환)의 악몽 같은 갈등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 역사극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데, 이 연극은 통속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임오화변(1762년)과 뒤주를 둘러싼 영조, 정조, 혜경궁 홍씨 등 모든 등장인물의 심리를 모던하게 그려냅니다. 불행한 가족사를 다룬 유진 오닐의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처럼 사도세자의 죽음을 놓고 벌어진 한 가정의 비극을 촘촘히 들여다보죠. 이를 통해 모든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자는 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산물이다. 때문에 우리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서를 통해 모두 알 수 없다. 진실이 억측의 탈을 썼는지, 역사의 관을 썼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당사자, 이 연극에선 혜경궁 홍씨만이 진실을 안다. "혜경궁 홍씨가 몸이 아팠고, 제어할 수 없었으며 광증마저 있었다는 소문과 통설을 연극은 모두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연극은 왜 그가 아들을 선택하고 남편을 버렸는지, 그 동기에 대한 이해를 찾아갑니다."
극의 절정은 임오화변이 벌어진 당일이다. 사도세자의 정인을 잡아낸 영조가 그래도 시기하지 않는 홍씨를 질타하면서 급기야 "뒤주를 내오라" 명령하는 장면이다. "살려달라" 소리치는 세자와 할아비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울부짖는 세손(훗날의 정조),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알려진 홍씨와 그의 아버지 홍봉한의 소극적인 대응이 노기 가득한 영조를 중심으로 힘있게 그려진다. 이 가운데로 극의 핵심인 뒤주가 들어선다. "세자에게 아버지처럼 친근했던 장인 홍봉한이 결과적으로 세자를 죽도록 방조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그는 귀신으로 홍씨의 꿈에 등장해 뒤주를 짊어지고 나가며 '내가 다 책임지고 간다'고 말합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트라우마, 걸림돌을 업고 나서며 매듭을 풀어내는 거죠."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 스산한 꿈자리에서 홍씨는 그를 막다른 곳으로 몰았던 모든 인물의 귀신들과 만난다. 이들이 뒤주를 둘러싼 채 각자 자기 얘기를 하고 홍씨와 어울려 한판 춤을 추고 굿을 한다. 잠을 깬 홍씨가 을 쓰기 시작하며 모든 갈등은 마무리된다. "뒤주가 의미한 삶의 굴레를 모두 내려놓는 씻김굿으로 마감하는 셈이죠. 일종의 제의극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 연극은 서양과 다르게 원한을 풀어줍니다. 악한도 원수도 모두 용서하는 결말이죠. 아무도 선의를 갖고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지금의 현실, 어수선하고 쓸쓸한 세상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심정입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