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주제로 한 번 더 쓰고 싶어졌다. 글을 읽은 사람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이상하고 우스운 이름을 이것저것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씨 집안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자. 어느 고씨 집안 28세손의 항렬자가 기(基)다. 영등포구 의회 고기판 부의장의 경우, 할아버지가 면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러 가면서 작명소에서 항렬자를 넣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에게 형제가 있는지,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고기~’로 시작되는 이름은 대체로 좀 어색해 보인다. 어디 한번 해볼까. 고기간 고기국 고기근 고기대 고기덕 고기도 고기돈 고기랑 고기만 고기망 고기목 고기무 고기방 고기배 고기복 고기본 고기사 고기서 고기속 고기손 고기술 고기안 고기열 고기오 고기요 고기운 고기인 고기전 고기조 고기주 고기차 고기창 고기채 고기첨 고기촌 고기충 고기칠 고기해...
하여간 고기판 부의장은 3년 전 지방자치선거 유세를 할 때 “고기는 바꿔도 고기판은 바꾸지 말자!”고 호소해 당선됐다. 서울 강남구청장 선거에 나선 민주당 이판국 후보는 “이 판국에 왜 이판국인가?”라고 외치고 다녔지만 당선되지는 못했다. 이름 덕을 봤건 못 봤건 이런 이름은 어려서부터 아이들 놀림감이 되기 쉽다.
나도 이름의 ‘순’ 자 때문에(항렬이 그런 걸 어떡해!) 계집애 이름이라고 어려서 놀림을 많이 받았지만, 그건 약과다. 한말돈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6남매 중 막내다. 무학인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면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러 가 끝동이라고 이름을 댔다고 한다. 면서기는 그런 한자는 없다면서 발음이 비슷한 末(끝 말)敦(도타울 돈)으로 이름을 지어줬다.
50~60년 전만 해도 면서기는 면에서 최고 유식한 사람이다. 지금으로 치면 거의 대법원장이고 헌법재판소장이다. 그 권위에 함부로 도전할 수 없다. 면서기가 크게 인심이라도 쓰듯 유식하게 이름을 지어주거나 음은 같지만 엉뚱하게 다른 한자로 등록을 하는 바람에 팔자가 달라진 사람들이 많다. 이름의 획수를 가지고 운수를 푸는 사람들이 보면 기겁할 일이다.
하여간 그래서 집에서 끝동이로 불리던 그 사람은 ‘한말돈’이 됐다. 돈이 한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면 오죽이나 좋아. 깡보리 농촌에 부자도 그런 부자가 없지. 그런데 돈은커녕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아이들이 말똥이라고 불러대는 통에 학교 다니기가 싫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뿐인가. 나중에 장가들어 아이를 학교에 보냈더니 담임교사가 가정조사를 할 때 부모님 이름만 나오면 아이들이 마구 웃으며 놀려 자식 대에까지 ‘이름 피해’가 이어지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2006년 7월에 포항지역 건설노조가 포스코 본사를 8일간 불법점거, 농성을 벌인 일이 있다. “전문건설업체와 노조 간의 성실교섭을 위한 대책 마련은커녕 파업현장에 대체인력 투입을 방관·묵인하는 반 노동자적 작태에 분노한다”는 게 점거농성의 이유였다. 농성을 주도한 노조 지부장의 이름은 이지경이었다.
점거농성으로 회사가 난장판이 되고 피해가 커지자 포스코 사람들은 그때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직접 관계도 없는 포스코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지경 씨는 결국 구속됐지만, 자라는 동안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J라는 여성은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의 이름이 쌍련이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여기는 학생들에게 그 선생님 스스로 설명하기를 아이를 낳기만 하면 죽어서 애를 태우던 부모가 이름을 욕으로 지으면 산다는 말을 듣고 ‘쌍년’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한자로는 ‘쌍련(雙蓮)이라고 등록했다. 제자들은 선생님을 놀리기보다 연꽃 두 송이로 기억해주었다니 참 착한 사람들이다.
J씨는 선생님의 이름을 가리려고 ‘K쌍련’이라고 알려주었는데, 나처럼 짓궂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가만있을 리 있나. 가나다, 아니지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순서에 입각해서 이름을 주욱 읊어댔다. 욕하는 거 같아서 좀 미안했지만 좌우간 우리나라 성씨를 다 뒤져 읊어댄 순서는 이렇다.
가쌍련, 간쌍련, 갈쌍련, 감쌍련, 강쌍련, 견쌍련, 경쌍련, 계쌍련(아아 숨이 차구나), 고쌍련, 곡쌍련, 공쌍련, 곽쌍련, 구쌍련, 국쌍련, 군쌍련, 궁쌍련(다시 숨 좀 돌리고), 궉쌍련, 권쌍련, 근쌍련, 금쌍련, 기쌍련, 길쌍련, 김쌍련. 그 선생님 이름이(정확히 말하면 성이) 이 중에 있느냐고 했더니 있다고 했다.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K로 시작되는 우리나라 성을 다 주워섬겼는데, 거기 있는 성이 어디 가겠어?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