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에 사는 주부 서영숙(54)씨는 지난달 LG전자 창원공장 관계자로부터 "소중한 제품을 오래 써주시고 기증까지 해주셔 감사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씨는 1983년 결혼 혼수로 산 이후 31년째 썼던 LG전자(옛 럭키금성)의 녹색 전자레인지(모델명 ER-5000)를 창원공장의 품질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제품은 1981년 5월 출시한 금성사의 첫 번째 전자레인지로 23리터 용량에 요즘 보기 드문 녹색을 띠고 있다. 서씨는 4일 "매일 썼지만 전구 한 번 바꾼 것 말고는 고장 한 번 없었다"며 "자식들 등살에 새 제품으로 바꿨지만 버리기 싫어서 회사 홈페이지에 기증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고 말했다.
만약 서씨가 기증하지 않았다면 몇 년은 더 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체 가전제품의 물리적 최대 수명, 혹은 적정 수명은 얼마일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제조업체들이 가정하는 평균적 수명은 있다. 가전회사들이 얼마 동안 부품을 보유 하는 지를 보면 적정 수명 추정이 가능하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소비자와 제조사 사이에 애프터서비스(AS) 관련 분쟁 해결을 돕고자 정해 놓은 '가전제품의 부품 보유기간'은 ▦TV, 냉장고 8년 ▦전자레인지, 에어컨, 정수기 7년 ▦세탁기 가스레인지 6년이다. 업계 관계자는 "보통 국내 가전제품의 평균 수명은 보통 6~7년, 길어야 10년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건강 관리를 잘 하면 평균 수명보다 10년, 20년을 더 살수 있듯 가전제품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수명은 늘어날 수 있다. 서씨는 30년 넘게 쓴 비결을 묻자 "쓸 때마다 떼를 꼭 닦고 기름진 음식을 쓴 뒤에는 물을 넣고 스팀을 올려 때를 불린 뒤 닦는 간단한 방법"이라며 "냉장고에 음식물 70% 정도만 채워 보관하기 등 작은 노하우를 습관으로만 하면 가전제품은 얼마든지 오래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참에 가전 회사들도 제품의 적정 수명 연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실 부품 보유 기간 이상을 쓰다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소비자는 해결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서울에 사는 주부 이경숙(56)씨는 지난달 11년째 쓰던 양문형 냉장고의 홈바 문이 고장 나자 AS를 요청했다. 그러나 서비스센터 직원은 "부품자재 관리망을 통해 전국을 뒤졌지만 부품이 없다"며 "모델이 달라도 크기나 기능이 비슷하면 대체 부품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공정위 보유 기간을 최대치로 삼는다"고 말했다. 현재 이씨는 고장 난 부분에 임시방편으로 테이프를 붙여 쓰고 있는데, "제품의 일부 이상 때문에 곤란을 겪어야 하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자혜 소비자시민모임 회장은 "TV 값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패널처럼 비싼 핵심부품은 고장이 나도 수리비가 엄청나서 가전회사들이 고치는 것보다 새 것을 사는 게 낫다고 유도한다"며 "가전회사들이 새 제품을 매년 경쟁적으로 내놓고 이를 파는 데만 신경 쓸 뿐 고객들이 어떻게 하면 오래 쓸 수 있는 지 관심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독일 가전회사 밀레의 경우 AS를 위한 최소 부품 연한을 20년으로 정해놓고 있다. 밀레코리아 관계자는 "정책적으로 최소 20년 이상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 20년 전 단종된 모델이라도 수시로 부품을 만든다"며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이라 광고했으니 그에 맞게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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