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빌라 입구에는 꽤 높은 탑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보니 'OO빌라'라고 씌어진 탑 꼭대기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었다. 주민들에게 의견을 물은 적도 없는데 웬 생뚱맞은 아이디어일까 생각했다. 나 말고도 싫어하는 사람이 꽤 있었는지, 반상회에서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모두 '종북'이라고 누군가가 일갈하는 바람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 아주머니가 내게 일러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북한 집집마다 걸려 있다는 김일성 초상화였고, 다른 하나는 진보진영 내부에서 '종북'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었다. '종북'이라는 말은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여 시효가 다해버린 '빨갱이'라는 말을 대신할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했다. 그것은 현재 지구상의 몇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 중 하나인 북한이라는 실체를 전제로 한 말이고, 세습왕국이자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수뇌부를 맹목적으로 추수한다는 퇴행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다. 게다가 좌파가 다른 좌파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말이니, 좌파 내부의 약한 고리를 걸어 좌파 전체, 아니 내 편이 아닌 나머지 전체를 한 덩어리로 몰아붙이기에 딱 좋은 말이다. 급기야 이 말은 사적 공간인 내 집으로 들어갈 때마다 태극기와 마주쳐야 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길 따름인 보통 사람들을 '이석기'와 동급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종북'이라는 말은 "닥쳐!"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닥치고 있지 않으면 너는 '이석기'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일이 지난 1년 간 온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도 시국미사에서 박창신 신부가 한 발언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은 "국론 분열을 야기하는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정작 종북몰이를 통해 국민을 분열시켜 이득을 얻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는 명약관화한 일이지만, 나는 강론 전문을 찾아 읽어보았다. 강론의 핵심은 이 시대가 북한을 원수로 만들고, 원수 북한을 빙자해서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것이고, 바로 그 종북몰이와 부정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으니 박근혜 대통령은 사퇴하라는 것이다. 아마 "부정선거", "사퇴", 이런 말들이 이 정권의 아픈 데를 송곳처럼 찔렀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박신부의 NLL 발언이었다. NLL은 남북 간에 합의한 해상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날뛰던 이승만정권을 제지하기 위해 당시 유엔군사령관이 우리 쪽에서 이 선 이북으로 더 나가서는 안 된다고 잠정적으로 그어놓은 선이다. 박신부는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언급하고 일본이 독도에 와서 훈련하면 포격할 수밖에 없듯이, 북한도 문제 있는 NLL지역에서 한미군사훈련을 계속하면 포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역지사지를 해보자고 말한 것이다. 강론을 통해 박신부는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원수사랑을 이야기했고,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북한을 원수로 만들어 그것을 빌미로 이 땅의 약자들을 낭떠러지로 모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하지 않았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장병들의 희생은 불필요한 군사적 자극 때문에 생겼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총체적 테러'가 전체주의적 지배의 본질이라고 했다. '총체적 테러'는 모든 것에 스며드는 공포분위기를 통해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사고를 마비시켜 자유로운 행동을 막고, 사회 전체를 영구적인 폭력상태로 만든다.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북몰이는 바로 그러한 '총체적 테러'이고, 본질적으로 그것은 전체주의 국가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신부의 발언이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려울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NLL에 대해서 박신부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자유를 빼앗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며,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적 지배로 가는 길이다.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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