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004년 오렌지혁명에 이어 다시금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2004년 당시 부정선거 의혹 속에 대통령에 당선됐다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재선거를 치르고 패배했던 그는 2010년 대선에서 부활했다. 전임 빅토르 유셴코 정부의 민주화ㆍ친서방 정책을 폐기하고 친러시아ㆍ권위주의 통치를 시행해온 그는 유럽연합(EU)과의 협력협정 체결 계획을 백지화했다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다. 규모 면에서 오렌지혁명에 비견되는 이번 시위가 정권 교체로 이어질 경우 야누코비치는 혁명으로 두번 쫓겨난 권력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전날 35만명에 이르렀던 반정부 시위대는 2일 수도 키예프의 시청과 노조 건물을 점거하고 정부 청사를 봉쇄하면서 사실상 키예프 도심을 장악했다. 정부 퇴진 및 즉각적인 총선ㆍ대선 실시를 주장하며 시위를 이끌고 있는 야권은 3일 의회에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고 표결에 부칠 방침이다. 시위대 수천 명은 3일 새벽부터 의회 건물을 포위하고 내각불신임에 찬성하라고 여당을 압박했다. 내각불신임에는 재적의원(450석)의 과반인 226표 이상이 필요하지만 야당은 215표를 확보한 상황이라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시위가 시작된 지난달 21일 이후 침묵을 지켜온 야누코비치는 2일 방송 인터뷰에서 “값 싼 러시아산 가스 공급을 계속 보장받아야 했다”며 EU 협상 중단 결정을 변호하면서 이번 주 중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 확대 협상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야권을 향해서는 “나와 맞서고 싶다면 2015년 대선까지 기다리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도로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며 중국 방문을 강행할 방침을 밝혔다. 뉴욕타임스의 논평대로 시위대 요구를 무시하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야누코비치는 그러나 이날 호세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에게 전화해 협력협정 재협상을 요청, 응낙을 받아내는 등 시위대를 달래는 모습도 보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그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소년원에 수감됐던 성장기를 딛고 최고 권력자이자 부동산 갑부가 된 입지전적 인물임을 지적하며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친서방적인 서부와 친러시아적인 동부로 갈린 우크라이나의 정치 구도에서 동부에 기반을 둔 야누코비치가 러시아에 등을 돌리기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 싱크탱크 카네기러시아의 릴리아 셰브쵸바 연구원은 “야누코비치는 2015년 재선 성공을 위해 EU 협력협정을 포기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야누코비치가 결정적 위기에 몰리면 더 확실하게 러시아 편에 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가디언은 이 과정에서 그가 비밀경찰이나 기득권층이 장악하고 있는 언론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우크라이나의 현상 유지로 유럽과의 완충지대를 유지하려는 러시아 역시 상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일 “혁명보다 포그롬(학살)에 가깝다”며 우크라이나 시위대를 비난했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에서 자행된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포그롬을 언급하며 이번 시위를 ‘혁명’으로 규정한 우크라이나 야권을 공격한 것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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