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한 마음이 컸는데 어제 '호두까기인형' 지방 첫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나니 새삼 쓸쓸함이 밀려 오더군요. '동화 속에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줘 고맙다'며 제 손을 꼭 쥐는 관객을 뵙고 '내가 바로 이 감동 때문에 이 길을 걸어왔구나' 싶었죠."
국립발레단을 12년 간 이끌며 한국 발레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었다고 평가 받는 최태지(54) 단장(예술감독 겸직)이 이달 말 발레단을 떠난다. 3일 만난 최 단장은 "매해 연말 공연 '호두까기인형'을 보며 다음해 계획을 세우곤 했는데 이제 정말 마지막 공연이라는 생각에 찡한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본 교토 출신인 최 단장은 1983년 '세헤라자데'에 객원 무용수로 출연하며 국립발레단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1996년 2001년까지 6년간 예술감독 자리를 지켰고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정동극장 극장장을 지낸 후 2008년부터 지금까지 다시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으로 일해 왔다.
발레계의 변방이던 한국 발레를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린 그의 공적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는 2000년까지도 단원 수 40여명, 연간 공연 횟수가 60여회에 불과했던 발레단을 단원 90명, 연간 공연 120여회 수준으로 외형을 키웠고 러시아 볼쇼이 예술감독 유리 그리가로비치와 프랑스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등 세계적 안무가들의 작품들로 레퍼토리를 구축해 왔다.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도 90%를 넘겼다.
그는 "함께 같은 길을 걸어 준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울 뿐"이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클래식 발레의 기초를 다지겠다는 목표는 이룬 것 같아 새로운 단장에게 바통을 넘겨 주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하다"고 말했다. "10년 전만 해도 발레는 서양예술이고 노력해도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팽배했지만 저는 창작 발레를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고전ㆍ낭만 발레부터 마스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발레나 오페라는 한 국가의 경제 수준과 직결되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예술이잖아요."
사실 그에게 발레는 시련과 영광을 동시에 안겨 준 숙명적 사랑이다. 9세 때 발레를 시작해 오오타니 야스에라는 일본 이름의 발레리나로 전국을 누비던 그는 20세 때 일본 정부의 해외연수제도 대상자로 뽑혔지만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탈락되면서 인생 행로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인이라는 귀속의식을 느끼게 됐고 한국 무대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물론 한국어를 거의 못해 두려움도 컸다. 재일동포 2세인 그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힘은 역시 "언어 없이도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인 발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아 오면서 감정대로 솔직히 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 하는 나 스스로가 딱할 때도 많았다"고 한다. 정동극장장 시절에는 부모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고, 올해는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가족에게 너무 미안해 오늘이 마지막이다, 하다가도 다가오는 길을 막지 못하고 계속 걸어 왔다"는 그다. 순간순간의 괴로움을 잊게 해 준 것은 관객과 단원이었다. "단원과 관객을 생각하면 주저앉을 수 없었어요. 관객이 나와 발레단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가 됐죠. 자식 같은 단원들이 좋은 안무가의 작품에 출연하고, 무대에 한 번이라도 더 서서 박수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마음도 컸어요."
그는 "발레의 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면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결국 발레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던 옛 발레 선생님의 말대로 돌이켜 보면 결국 이 드라마틱한 삶이 운명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발레에서는 훌륭한 선생님보다 거울에 비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집중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의미로 '거울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한다. 최 단장의 거울 선생님이 제시하는 그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오케스트라를 갖춘 전용 극장이 아직 없고 숙원사업이던 발레학교를 세우지 못한 채 떠나는 점은 아쉽지만 발레단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외국 경험이 많은 강수진씨가 발레단을 새로 맡는다고 하니 기대가 커요. 예술도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건데 저는 인간답지 못하다고 할 정도로 나를 위한 시간이 전혀 없이 살아온 것 같아요. 이제서야 퇴임을 결심하다니, 나이 쉰을 넘긴 지금에서야 삶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됐네요."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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